09.환권태자

고구려 영류왕의 태자 환권

by 한휼
09_고구려_06_환권_08_20230213_170117.jpg 고구려 태자 환권 일러스트


고구려 환권태자(桓權太子)

태자 고환권(高桓權)은 고구려 27대 태왕 영류왕과 왕후의 장남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부왕인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시해될 때 함께 죽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서기 640년 2월에 당나라에 가서 조공했다. 당 태종이 태자 환권의 노고를 위로하고 폐백(幣帛)을 주었다.



[폐왕 영류왕의 태자]

영류왕의 태자인 환권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정도뿐이다. 아마도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태자로서 무엇을 했으며,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태자는 일단은 정치인이다. 당시는 당나라에 대해 주전파와 주화파로 국론이 극렬하게 분열되는 시기였다. 영류왕은 당과의 우호 관계와 평화를 원했고, 연개소문은 전쟁으로써 국격을 높이기를 원했다. 그 사이에서 태자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왕의 반대편에 선 태자는 대체로 좋은 말로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둘 사이에서 완충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전파는 영류왕의 정책을 그저 우호 정도로 보는 것을 넘어 치욕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영류왕은 그런 그들의 불만에 대해 아무 조치도 관심도 갖지 않았다. 이로써 반역이 일어난 것이고 왕은 시해됐다. 태자도 아마 그때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정한 자리가 아니니 능력의 부족함을 책망할 수는 없으나, 그 자리에 조금 더 소통과 이해와 양보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이 섰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연개소문 가문과 고구려의 멸망]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쥔 인물이다. 쿠데타 이전의 영류왕 정권의 입장은 당나라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유지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던 중에 연개소문 등 강경파가 이상적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나선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싸우는 것이 비현실적이니 평화를 유지하려는 영류왕 등 온건파와 자존심을 앞세워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려는 연개소문 등 강경파로 나뉘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집안은 대대로 막리지를 맡아온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다. 이런 강력한 집안이 귀족들을 선동하여 우월주의에 취하게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니 영류왕 일파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다. 여기서 주의하여 봐야 할 점은 영류왕이 온건적인 정책을 편 이유가 당나라가 좋아서 친당 세력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류왕은 선왕 때부터 중국과의 전쟁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영류왕은 현실을 볼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 건국 이전에 존재했던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앞세워 당나라와 전쟁을 연달아서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행위였고 자살행위였다. 결론적으로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한 계획이 들통났고, 연개소문은 군벌 세력을 이용하여 영류왕을 시해했다.

영류왕을 시해한 뒤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세우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다. 왕이 직접 되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인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영류왕은 당시의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은 군주였고, 보장왕은 개인이 마음대로 갈아치운 군주였다. 이러한 사실은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했으나 안시성을 넘지 못했다. 전쟁이 길어져 1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면 경제가 어려워지고 민심을 잃게 된다. 따라서 전쟁을 오래 끈다는 것은 정권 차원에서도 국가 차원에서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당나라는 결국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퇴각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주변국을 돌며 도움을 요청했다.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한 곳은 고구려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고, 왜국에도 건너갔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당나라로 넘어가 화친을 요청한 결과 겨우 나당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자식까지 볼모로 보내면서 당나라와의 동맹을 이뤄냈다. 그 결과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백제가 멸망 당하는 걸 지켜본 고구려는 여전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당나라를 적대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전쟁터로 끌려갔고, 내분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런 중에 당나라가 계속 침공해오니 버틸 국력이 없었다. 전쟁은 외교에 실패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인데 고구려는 무작정 자존심만을 내세워 싸우려고만 하니 민심을 잃고 멸망의 길로 떨어져 간 것이었다. 반면 신라는 비록 군사력은 약했으나 각국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외교를 통해 필요한 것을 얻어갔다.


백제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65년, 연개소문이 아무런 조치도 없이 죽었다. 당시 고구려는 내분, 정치적 분열과 불안정에 민심까지 잃어버린 상황에 당나라와 신라를 홀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이 권력을 잡고자 내분을 일으켰다. 연남산과 연남건이 연남생을 죽이려 하자, 연남생은 평양성에서 북쪽 국내성으로 도망쳤는데 때마침 서북 방향에서 당나라가 침공해왔다.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연남생은 서북쪽에 있는 성들을 회유하여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렇게 당나라는 곧장 수도 평양성까지 진군할 수 있었고 평양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공격한 군대 중 일부는 연남생을 포함한 고구려의 군대였다. 또 남쪽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자 신라에 투항하여 부유하게 대접 잡으며 살다가 편안히 죽었다. 그렇게 668년, 고구려는 사살상 내분으로 멸망했다.



[돌아보며]

고구려의 즉위하지 못한 계승자들 곧 태자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주어진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됐다. 국왕과 독립적으로 극명하게 반대입장을 세우거나 정권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국왕과 같은 편에 서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내려놓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태자의 이름만 갖고 있거나 하는 경우였다. 태자는 말 그대로 후계자이기 때문에 국왕과 완전히 독립적인 세력으로 서서는 안 된다. 동시에 태자도 신하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왕과 더불어 앵무새 마냥 예스맨이 되어서도 안 된다. 또 대접받기만 하며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태자는 계승권자라는 입장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신하라는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에 그 이름을 아름답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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