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의 태자 조다
고구려 태자(太子) 조다(助多)
태자 고조다(高助多)는 고구려 20대 태왕 장수왕의 장남이며 모후의 기록은 없다. 결혼 후 요절하여 왕위를 승계하지 못했다. 장수왕에 이어 조다의 아들 나운이 즉위하니 그가 고구려 21대 태왕 문자명왕이다. 아들에 의해 태왕으로 추존되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장수왕이 98세에 붕어한 것을 보면 재위 후반기 혹은 일부는 조다가 원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래 산 임금과 짧게 산 왕자]
조다에 대한 세간의 말은 부왕이 너무 오래 살아서 왕이 되어 보지 못하고 죽은 안타까운 왕자라며 다소 조롱 섞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부왕이 오래 살았던 핑계로 넘어갈 일인지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기록으로 보건대 장수왕은 아들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장수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 조다의 아들이었다는 점으로 보건대 조다는 태자였고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를 두고 역사에 이름을 남겨볼 기회를 장수왕이 오래 삶으로써 잃었다고 수동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의 근구수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 고대 국가들은 왕족과 귀족들이 그저 앉아서 호의호식만 하는 그러한 귀족사회가 아니었다.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이 앞장서서 싸우며 행동했고 그에 따라 공적을 쌓는 시대였다.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고국원왕을 피살한 전투 역시 당시에 근초고왕의 태자였던 근구수왕이 주도한 전투였다.
[외교의 천재 장수왕]
서기 438년. 고구려 요동에서 북연의 3대 황제 풍홍이 고구려의 장수에게 참수되었다. 황제뿐 아니라 10여 명의 황자들까지도 모두 살해당했다.
[왕이 풍홍을 남쪽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장수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자손 10여 인도 죽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6년]
사건의 배후에는 고구려의 20대 장수왕이 있었다. 고구려는 19대 광개토왕 때 전성기를 이뤘고 이어서 즉위한 장수왕 때에 더욱 번영했다. 장수왕은 80여 년 재위 기간 중에 고구려는 전쟁을 거의 치르지 않았고 외교를 통해 대외관계를 안정화했던 군주였다.
서기 438년. 장수왕 44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중국은 다섯 이민족과 한족이 화북 지역에 여러 나라를 세우고 가축을 벌이던 5호 16국이 북위에 의해 서서히 통일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는 남북조시대로 북쪽에는 북위, 남쪽에는 유송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북연은 후연을 계승한 국가였다. 전연, 후연, 북연 순서로 요서 지역에 존립했던 나라였는데, 후연 시대에 세력이 가장 강성했고, 광개토왕 당시 격전을 벌이던 국가였다.
사건의 발단은 고구려로 전해진 두 개의 외교문서로 시작했다. 435년, 북연의 황제 풍홍(馮弘)이, 436년 북위의 황제 탁발도(拓跋燾)가 은밀하게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당시 북연은 북위에게 밀리고 있던 상황으로, 북연의 풍홍은 상서 양이를 보내 고구려에 의탁하고자 했고, 북위의 탁발도는 북연을 토벌하려는 계획을 몰래 알려왔다. 이후 북위는 계획대로 북연을 침공했고, 북연의 수도 화룡성 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이때 장수왕이 보낸 수만 명의 고구려 군대가 몰려왔다. 북위군이 당황한 사이 고구려군은 화룡성을 먼저 장악한 뒤 북연 군의 갑옷을 입고 약탈을 시작했다. 이후 고구려군은 약탈한 재화와 백성들과 후연의 황제를 데리고 요동으로 귀환했다. 북위의 입장에서는 아직 고구려와는 맞붙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백성과 재화를 모두 빼앗기고 텅빈 땅만을 차지한 북위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장수왕은 수많은 변수 사이에서 정확한 판단력으로 충돌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얻을 것을 모두 취했다. 고구려 측은 수많은 난민을 수용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효과도 얻었다. 또 북연은 중화의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적 역량을 나름 갖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요동에 거주시킴으로써 요동 지역을 개발하는 데에 이용했다.
고구려의 출병 소식을 들은 북위의 황제 탁발도는 격노했다. 결국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풍홍을 데려오게 했다. 이에 고구려 측에서 답하기를, 풍홍과 함께 황제의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내용의 표문을 올렸다. 예의와 격식을 갖추되 상대의 요청은 거절하는 외교적 수사였다. 대답을 들은 북위의 황제 탁발도는 분노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직 화북 통일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구려와 싸울 수 없었다. 장수왕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읽고 출병했던 것이었다.
외교적 수사에서는 이와 같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라고 하는 것이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를은 “외교관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고려해보죠’라는 뜻이고 ‘고려해보죠’라고 말한다면 그건 ‘안 됩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외교관의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외교에서 빙빙 돌려서 말하는 이유는, 국제 외교에서는 한 번의 대화로 모든 것을 끝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걸 분명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을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한다. 이로써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고 양측 모두 정치적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단정적으로 끝난다는 것은 외교가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풍홍을 구출한 장수왕은 또다시 외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화룡성을 탈출하여 고구려의 요동에 도착한 북연 황제 풍홍에서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위로를 전했는데, “용성왕 풍군이 이곳까지 와서 노숙을 하느라 군사와 말이 얼마나 고달프겠는가.”라고 하여 풍홍을 황제가 아닌 지역의 왕으로 낮춰 호칭했다. 이에 분노한 풍홍은 유송에 자신을 받아달라고 망명 요청을 보낸다. 패망한 북연의 황제를 둘러싸고 고구려, 북위, 유송간의 국제 분쟁의 서막이 열렸다. 풍홍이 요동을 기반으로 재기한다면 북위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이었기 때문에, 장수왕이 이를 사전에 견제했던 것이었다. 이에 훗날을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풍홍은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풍홍의 망명 요청을 받은 유송은 고구려에 풍홍을 넘길 것을 요청해왔다. 유송은 풍홍을 데려가기 위해 군대를 고구려에 보냈고, 풍홍은 가족과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고구려의 군대가 나타났고, 장수왕의 외교에 계속해서 걸림돌이 되던 풍홍과 가족들은 결국 참수당했다. 풍홍은 처리했으나 유송의 군대가 문제가 되었다. 풍홍을 데려가는 것이 임무였던 유송의 장수가 고구려의 장수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장수왕은 딜레마에 빠졌다. 유송을 공격하자니 전쟁이 벌어질 것이 문제였고, 참고 넘어가자니 고구려의 위신과 내부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장수왕은 유송의 장수를 체포하여 유송의 장수가 고구려의 장수를 자기 마음대로 죽였으니 스스로 처벌할 것을 조건으로 달아 유송으로 송환했다. 고구려의 조건대로라면 유송의 황제의 입장에서도 장수가 마음대로 한 일이니, 처벌해도 자신이나 국가의 위신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에 유송에서는 해당 장수를 잠시 투옥했다가 방면했다.
이 사건 이후로 고구려는 유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위를 견제했다. 유송이 북벌을 시도할 때 말 800필을 보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북위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각 나라에 같은 비중을 두면서 중립을 지향하는 등거리 외교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러한 외교 전략으로 고구려는 약 80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와의 이러한 평화적인 외교적 관계는 추후 약 200년간 이어졌다.
장수왕의 외교는 현대적으로도 재평가될 수 있는데, 한 나라에 편중하지 않고 여러 나라와 두루 외교활동을 벌이는 것을 다자외교라고 한다. 대표적을 UN은 적대적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외교를 진행한다.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만들지 않는 다자주의는 특히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와 같은 경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며]
물론 조다가 죽은 시점이 어느 때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정말로 공을 세울 시간조차도 없었을 수도 있다. 사서에는 그저 일찍 죽었다고만 기록하고 있고 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결혼 후 일찍 죽었다고만 말하고 있다. 보통 태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 태손이 왕위에 오르면 그 태자는 왕으로 추존된다. 하지만 조다는 추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저 조선으로 치면 대원군 정도가 되는 고추가에 멈춰있다. 이를 두고 조다의 아들로 기록된 문자명왕의 계보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으나, 적어도 태자의 신분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적이 없었고, 때문에, 죽은 뒤에도 그 이름이 높여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부왕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핑계로 역사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의 효명세자의 경우를 보면 마땅한 예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