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
고구려 추안태자(鄒安太子)
태자 고추안(高鄒安)은 고구려 7대 태왕 차대왕과 왕후의 장남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서기 165년에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폐출되어 시해될 때 추안은 궁궐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다. 8대 신대왕이 왕위에 오르고 대사면령을 내리자 추안은 신대왕을 찾아가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신대왕은 추안을 사면하고, 구산뢰(狗山瀨)·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어 양국군(讓國君)에 봉했다. 그 이후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차대왕 치세]
삼국사기에 기록된 차대왕의 시대를 간략히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 태조왕의 동복동생이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태조왕이 물려준 왕위를 받아 등극하니 즉위 당시 나이 76세였다.
재위 2년인 147년의 기록들이다. 2월.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에 임명했다. 3월에 고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기를, “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니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고 사형을 받아 죽었다. 원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라 하였다. 10월에 비류나부 양신을 중외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우태라고 하니 그들은 모두 차대왕의 옛 친구였다.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위의 재위 2년의 기록은 3월부터 선왕 태조왕의 근신을 제가하고 자신의 측근들로 조정을 채운 내용의 기사들이다. 차대왕이 즉위한 때는 146년 12월이다. 따라서 즉위하고 오래지 않아 곧바로 숙청을 단행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배치하여 권력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고복장은 차대왕이 즉위하기 두 달 전인 10월에 태조왕에게 차대왕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니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간언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태조왕은 자신이 이미 늙었고 당시 차대왕의 권력이 이미 너무 강해져있었기 때문에 12월에 차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복장은 차대왕의 즉위와 동시에 제거 대상 1순위가 된 것이었다.
재위 3년인 148년의 기록이다. 4월에 차대왕이 사람을 보내 태조왕의 장남 막근을 죽이자 그의 아우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7월에 왕이 평유월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면서 울었다. 왕이 여우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여우는 요사스럽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더구나 그 빛깔이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간절한 뜻을 말로 전할 수 없으므로 요괴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반성할 줄 알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덕을 닦으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차대왕이 말하기를. “흉하면 흉하다 하고 길하면 길하다 할 것이지, 이미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인가?” 하고 마침내 그 무당을 살해했다.
무릇 합법적인 계승자가 아닌 왕이 즉위하면 왕위를 빼앗긴 합법적인 계승자는 살아남기 어렵다. 태조왕의 장남으로 기록된 막근 역시 차대왕의 즉위에 반대했던 고복장에 이어 목숨을 빼앗겼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의 사관은 태조왕이 어질지 못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충신과 두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조왕이 좋아서 동생 차대왕에게 양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왕위를 빼앗김으로써 불행이 이어졌다. 또 무당의 말도 신하라면 의례적으로 할법한 말이지만 귀에 거슬리는 말로 여기고는 간언을 마음에 새기지도 반성하지도 않고 죽여버렸다.
재위 4년인 149년의 기록이다. 4월 그믐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5월에 5성이 동방에 모이니 일관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말하되,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했다.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재위 8년인 153년의 기록이다. 6월에 서리가 내렸고, 12월에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그믐날 객성이 달을 범했다.
재위 13년인 158년의 기록이다. 2월에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5월 그믐 갑술일에는 일식이 있었다.
재위 20년인 165년의 기록이다.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별세하니 나이 119세였다. 10월에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차대왕을 죽였다. 호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사실 20년간 재위했던 기록치고는 그 양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얼마 되지 않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자 시절부터 전자에 나가 공을 세웠던 것을 봐도 무(武)에 치우친 성향의 인물이었으며, 귀에 쓴 말은 싫어하고 듣기에 달콤한 말은 좋아했다는 것이다. 차대왕은 모본왕에 이어 고구려에서 폐위된 두 번째 임금이다. 그런데 모본왕의 경우 기록 자체가 별로 없긴 하지만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봐도 딱히 폭정을 행한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인성에 대한 기록은 주관적인 것이라 적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만 그 행적은 그 인간됨을 판단하기에 적당하다. 모본왕은 중국 한나라를 침공하면서도 화친에 응하여 화해하는 등 기록된 대로 인성은 포악했을지언정 나름 군주로서의 역할을 행한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 하지만 차대왕의 경우 기상이나 천문을 제외하면 사냥과 살인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차대왕은 행실을 고치라는 간언을 올린 무당을 죽여버렸고, 이로 말미암아 신하들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더는 바른말을 꺼내 올리지 못했다. 듣는 귀가 막힌 지도자와 말하는 입을 막는 지도자는 성공할 수 없다. 아무리 추앙을 받고 찬양을 받으며 등극한 군주라도 혼자 모든 것을 독점하고 귀를 막고 말하는 자들의 입을 막는다면 반드시 패망한다. 하물며 차대왕은 비록 공적은 있었으나 왕위를 찬탈한 군주였다. 정통성이 없는 임금은 누구보다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등극에 반대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아 조정의 분열을 막아야 하고 정통성에 시비를 거는 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업(功業)을 쌓아야 한다. 익숙한 예시를 들자면, 조선의 9대 성종은 선왕 예종의 조카였고 장남도 아닌 둘째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유학자로서 모범생의 모습을 보였고, 17대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세자에게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청나라에 부정적이지 않았던 소현세자와 반대 성향을 내세워 북벌을 주장하며 사대부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쟁취한 경우라면 그 소유권과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무작정 힘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핍박으로 정당성을 강요한다면 그 자리는 오래 지킬 수 없다.
[돌아보며]
추안태자의 경우는 모본왕의 태자 고익의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부왕의 왕위계승이 순탄치 못했다는 점까지도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즉위 당시 모본왕의 경우보다 차대왕이 압도적으로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다. 태조왕과 차대왕의 나이를 기록된 대로 믿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나이 차를 최소로 잡더라도 차대왕의 즉위 당시 나이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고, 차대왕의 태자인 추안 역시 나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부왕이 즉위 당시 고령이었던 만큼 그 태자인 추안태자 역시 나이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즉 정치에 관여할 수 있을 나이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차대왕의 폭정을 막지 않았다. 태자는 목숨을 걸고 부왕을 정도(正度)로 이끌지 않았다. 물론 기록에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추안태자가 부왕에게 명확하게 일침을 가하고 충심과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면 명림답부와 반정군의 선택은 신대왕이 아니라 추안태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부왕의 편에 명확하게 선 것도 아니었으니, 명림답부가 반정을 일으켰을 때는 도망쳤다가 대사면이 내려지니 찾아와 자수한 것을 보면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챙긴 인물로 비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