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막근태자

고구려 태조왕의 태자 막근

by 한휼
06_고구려_05_막근_08_20230213_161644.jpg 고구려 막근태자 일러스트


고구려 막근태자(莫勤太子)

태자 고막근(高莫勤)은 고구려 6대 태왕 태조왕(太祖王)과 왕후의 장남이다. 태어난 연도는 알 수 없고 서기 148년에 죽었다. 부왕인 태조왕이 동생인 차대왕(次大王)의 무리에게 폐위됨으로써 막근도 왕위를 잇지 못하고 차대왕에 의해 살해당했다.



[찬탈]

태조왕과 차대왕과 그들의 부친이라고 하는 재사(再思) 고추가(古鄒加)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따라서 막근태자와 차대왕의 관계 역시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막근태자는 태조왕의 장남 곧 태자이고, 차대왕은 막근태자의 숙부가 된다. 따라서 자신에게 와야 할 왕위가 숙부에게로 넘어간 것이었다. 이는 태조왕이 동생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쥐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대왕이 왕위를 앗아갈 당시 태조왕의 나이는 이미 100세를 훌쩍 넘긴 뒤였다. 따라서 막근태자 역시 충분한 나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도 나서서 전쟁에 참여하며 공적을 쌓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차대왕이 노골적으로 왕위를 노리게 된 시점에서 태조왕이 별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동생 차대왕에게 양위한 것을 보면 막근태자는 별다른 큰 공을 세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본왕에서 태조왕으로]

삼국사기에 태조왕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태조왕은 고구려의 6대 태왕으로 이름은 궁(宮)이다. 아버지는 고추가 재사, 할아버지는 2대 유리명왕이다. 5대 모본왕과 그의 태자 고익이 서기 53년에 두로에게 피살됨으로써 왕위가 돌아오게 되었는데, 기록상으로는 당시 그의 아버지 고추가 재사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는 이유로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아들인 태조왕이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이후 재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재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2대 유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신채호는 3대 대무신왕의 손자로 기록하고 있다. 재사의 부인은 부여 출신인데 부여 출신의 태후라는 뜻에서 부여태후로 불린다. 부여태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태조왕을 대신하여 섭정했다고 한다.



[태조왕, 100년 치세]

흔히 왕으로서 장수한 임금 하면 이름 그대로 장수왕을 떠올린다. 장수왕은 향년이 약 98세, 재위 기간은 약 80년이었다. 반면 태조왕은 향년이 약 119세, 재위 기간은 약 9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본왕에서 태조왕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태조왕의 치세는 수수께끼인 부분이 많다. 119세라는 수명이 인간으로서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기간임에 틀림이 없다. 또 태조왕 이후 이어지는 계보 역시 쉽게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와 관련하여 이 즈음 고구려의 왕조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재사와 태조왕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다른 가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


태조왕은 부족들이 연합한 작은 국가였던 고구려를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그 강력한 고구려로 발돋움하게 만든 임금이었다. 동옥저, 갈사국, 예맥, 현도군, 요동 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이 당시 중국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왕망에 의해 한 차례 멸망한 다음 재건된 후한(後漢)이었다. 태조왕은 후한을 상대로 공세와 외교를 병행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또 내부적으로는 각 부족의 연맹 체제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여 고구려를 연맹왕국에서 고대국가로 진화시켰다.


하지만 태조왕은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그렇게 즉위한 후임자가 바로 고구려의 7대 태왕 차대왕이다. 중국 측의 기록에는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우리 측의 기록에는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의 기록인 만큼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 태조왕의 장남으로 기록된 막근은 기록에 태자라는 호칭은 없고 원자(元子)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차대왕이 태조왕의 동생이 아니라면 막근과 차대왕은 이복형제일 것이고 한쪽은 적장자, 다른 한쪽은 서장자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위를 이은 것은 차대왕이었고, 만근은 차대왕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돌아보며]

고구려의 태조왕은 국가의 단순히 국가의 영역과 힘을 키운 정도가 아닌 국가의 수준을 진화시킨 위대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아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태조왕의 동생으로 기록된 차대왕의 활약은 많이 남아있지만, 장남으로 기록된 막근의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태자라는 자리는 전장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기는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의 태자도 황태자라는 자리 때문에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기회를 동생인 이세민에게 상당 부분 빼앗겼고, 결국 건국과 수성의 공로는 동생 이세민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황위조차 이세민에게 빼앗기니 이세민이 바로 당 태종이다. 이처럼 분명 태자는 공을 세우기에 쉽지 않은 자리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의 근초고왕 대에 태자였던 근구수왕은 태자의 신분으로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격살(擊殺)하는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몽골과 협상에 성공한 고려 고종의 태자였던 원종, 여러 분야에서 부왕 순조를 대신하여 업적을 세웠던 조선의 효명세자, 그리고 정치 체제는 조금 달랐으나 스이코 천황을 대신하여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왜국의 쇼토쿠태자 등, 왕위계승자로서 태자로서 그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막근태자는 저군(儲君)으로서, 국본(國本)으로서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역사에 행보 하나 없이 그저 이름 하나만을 남겼다. 또 결국 역적의 왕위 찬탈을 막는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설령 막근태자가 아닌 차대왕이 태조왕의 적장자였고 왕위계승권자였다고 하더라도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차대왕의 행보는 분명 반역이었다. 왕자로서 이를 막지 못한 것은 분명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주어진 자리가 큰일을 하기에 어려운 경우가 있다. 대표도 아니고 구성원도 아닌 애매한 직책과 권한을 가진 경우 행동하기가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왕조를 예시로 보더라도, 임금이 정치를 등한시하고 내팽개치거나 심지어는 폭정을 일삼을 때, 태자의 자리에서 이에 적극적으로 맞서다가 죽거나 쫓겨난 경우도 있고, 그저 때를 기다리며 자리만 보전하다가 임금과 함께 쫓겨난 경우도 있다. 물론 세상살이나 사회생활은 정답이 있는 시험문제와는 다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지혜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일단은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익히는 이유는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국가 관계도 사람 사이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적용하는 능력만 있다면 내가 국왕이나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역대 군신(君臣)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능력이나 위치를 두고 볼 때 자신이 한없이 작고 무력해 보일 수 있다. 그럴수록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돌아보고 자신에게 적용하여 돌파구를 찾는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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