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모본왕의 태자 익
고구려 태자(太子) 익(翊)
태자 고익(高翊)은 고구려 5대 태왕 모본왕과 왕후의 장남이다. 서기 48년 10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다른 기록은 없다. 서기 53년에 부왕인 모본왕이 폭정으로 폐위되어 살해당했는데 당시에 같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민중왕과 모본왕의 수수께끼]
태자 익의 아버지는 5대 모본왕이다. 모본왕은 3대 대무신왕의 아들이며, 4대 민중왕의 조카이며, 낙랑국을 멸망시키는데 공헌한 호동을 재치고 태왕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서기 44년에 부왕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모본왕의 나이가 너무 어려 숙부인 민중왕이 국인(國人)들의 추대를 받아 대신 등극했고, 서기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순리대로 보위를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등극한 모본왕은 폭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본왕의 등극과 폐위 과정을 보면, 이복형 호동이 죽은 뒤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려서 왕위를 잇지 못하여 대무신왕의 동생 민중왕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이후 민중왕이 약 4년간 재위 끝에 죽자 다시 왕위는 모본왕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폭정으로 국인(國人)에 의해 폐출되었다는 것이 모본왕의 등극과 폐위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모본왕의 나이에 대해 이상한 점이 있다. 고구려에서 태자 책봉은 보통 10대 중반에 이뤄진다. 대무신왕은 10살을 조금 넘었을 때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이는 보통의 경우보다 빠른 나이였다. 모본왕의 출생은 기록에 없기 때문에 태자에 책봉될 때 몇 살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보통의 경우로 보건대 태자에 책봉되었던 서기 32년에 모본왕은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무신왕이 죽은 것은 태자 책봉 이후 12년이 지난 서기 44년이었다. 즉, 모본왕이 태자에 책봉될 때 나이를 최소로 잡아서 10살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버지 대무신왕이 죽었을 당시 모본왕의 나이는 22살이 된다. 임금이 죽은 상황에서 22살인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임금의 동생을 왕위에 추대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이후 민중왕이 죽고 모본왕이 즉위한 것은 서기 48년이었다. 그리고 즉위하자마자 바로 모본왕의 아들 익을 태자에 책봉했다. 이때 익의 나이 역시 마찬가지로 최소 10살은 넘겼을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대무신왕이 죽은 시점에서 모본왕은 20대 이상이었고 심지어 최소 6살 이상의 아들도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일설에는 민중왕을 모본왕의 숙부가 아닌 형으로 보기도 한다. 민중왕의 누구의 아들인지를 떠나 장성한 태자가 아닌 다른 왕족이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기록이 충분히 남아있지 않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은 기록만 두고 봤을 때 이상한 정황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폭군으로 남은 모본왕]
모본왕은 태자에 오를 때도, 왕위에 오를 때도 곧바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기록에는 없으나 태자에 오를 당시에도 이복형 호동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대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왕위 역시 어떤 형태였든 숙부 민중왕에게 순서를 빼앗겼다. 호동이나 민중왕이 모본왕을 제거하고자 했다면,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를 죽인 광해군이나 조카를 몰아내고 죽인 수양대군과 같은 선택을 하여 진작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등극할 수 있었다. 원비의 장남이었고 태자였으니 사실 정통성은 갖추고 있었다. 어쨌든 어렵게 얻은 자리이니 마땅히 그 맡은 역할에 충실하며 주어진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폭군으로 남았다. 사람을 깔고 앉고 베고 눕고 움직이면 가차 없이 죽였다. 그런 폭정 끝에 결국 측근 두로에게 살해되었다. 모본왕에 대한 기록도 많지는 않다. 삼국사기는 즉위와 폐위 사이에는 두 가지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기록이 먼저 있고, 이후에는 사람들을 깔고 앉고 베고 누워 움직이면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다음으로 신하인 두로에 의해 살해되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서 추론을 해보자면, 궁예와 유사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궁예는 초반에 백성들을 구휼하며 민심을 얻어 세력을 형성하고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나, 호족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미륵을 자칭하며 많은 호족들을 죽였고 이에 반대 세력이 형성되어 결국 폐위되고 죽었다. 모본왕 역시 폭정의 기록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했던 행위보다는 그 대상은 신하들로 보인다. 당시의 신하들은 대부분 귀족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이 확실히 확립된 국가를 만들고 싶었고, 이것이 귀족들의 눈에는 폭정으로 보였던 것이 아닐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이미 수 천 년이 지난 일이니,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본왕은 살해되었고 그 아들인 태자 고익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역사 속에서 그 죽음조차도 기록되지 못했다.
[모본왕의 태자 고익]
모본왕의 태자 고익에 대해서는 태자 책봉과 관련된 언급 외에는 기록이 없다. 또 장남에 대해서는 반드시 장남이라고 기록하는 삼국사기에서는 왕자 익을 태자에 책봉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모본왕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간략히 기록한 것인지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태자에 책봉된 시점은 서기 48년이고, 아버지 모본왕이 폐위된 것은 서기 53년이다. 아마도 모본왕 폐위 직후에 태자 익 역시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자 책봉 당시 나이를 10대 초반으로 가정한다면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돌아보며]
고익은 모본왕에게 가족으로서는 아들이며, 신하로서는 왕태자였다. 일단 현존하는 기록만을 기준으로 하여 모본왕이 정말 폭군이라고 했을 때, 기록이 없어 태자가 과연 부왕 모본왕의 폭정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왕이 폭정을 거행하며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데 아들로서, 태자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는 태자 역시 맡은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10대 어린아이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기는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