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해명태자

고구려 유리명왕의 태자 해명

by 한휼
03_고구려_02_해명_08-20230116_1022412.jpg 고구려 해명태자 일러스트


고구려 해명태자(解明太子)

해명태자는 고구려 2대 태왕 유리명왕(瑠璃明王)과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인 왕후 송씨의 아들이다. 유리왕에게는 차남이 된다. 기원전 12년경에 태어나 서기 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서기 9년에 죽었다. 나이로 보면, 16살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21살에 죽은 것이었다. 형 도절과 마찬가지로 부왕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잇지 못했다.



[두 번째 태자]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이를 듣고 서기 8년 1월에 이웃 나라인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해명태자를 시험해보기 위해 튼튼한 활 하나를 선물로 보냈다. 이에 해명태자는 황룡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꺾어버렸다. 당시 해명태자의 나이 20세였다. 이를 들은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해명이 효성이 없으니 그를 죽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태자 제거]

해명은 형인 도절태자가 죽고 3년 뒤인 서기 4년에 16세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태자에 책봉되기 한 해 전인 서기 3년에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옮겼는데. 이때 해명은 기존의 도읍인 졸본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유리왕과 태자가 분조(分朝)의 형태를 띠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도읍이었던 졸본에도 태자와 함께 관료들이 있었다. 유리왕이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천도했던 것은 부여와의 화친 과정에서 장남 도절태자를 제거했던 사건으로 등으로 민심이 떠났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해명이 오히려 그곳에 남아 세력을 형성하고 민심을 얻고 있으니 태자 해명과 강경파의 반란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 황룡국 사건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유리왕은 이를 명분 삼아 자신의 두 번째 태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태자를 죽여달라는 유리왕의 요청을 받은 황룡국 왕은 서기 8년 3월에 졸본으로 사신을 보내 해명태자를 초청했다. 태자가 초청을 수락하려고 하자 주변에서는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만류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태자 주변에는 역시 태자를 따르는 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해명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며 결연한 마음으로 황룡국으로 갔다. 하지만 황룡국 왕은 고구려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태자를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황룡국을 이용하여 태자를 죽이는데 실패한 유리왕은 서기 9년 3월에 직접 태자에게 자살을 명했다. 유리왕이 해명에게 “나는 도읍을 옮겨 나라를 튼튼히 함으로써 백성을 편안히 하려 했는데 네가 강한 힘만 자부하여 이웃 나라의 원한을 샀으니 자식의 도리라 할 수 있느냐”며 칼을 주고 자살을 시켰다. 이에 태자가 자살하려고 하자 주변에서는 이를 말렸지만 “우리나라를 황룡 왕이 가벼이 여길지 몰라 그 활을 부러뜨린 것이었는데 뜻밖에 부왕께서 이를 책망하고 자살하라 하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창을 거꾸로 꽂은 후 그 위로 말을 달려 자결하였다. 나이 21세였다. 그가 죽은 곳을 창원(槍原)이라 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국은 고구려의 태자에게 활을 보냈다. 당시 고구려는 태왕과 태자가 각각 신 도읍과 구 도읍에 나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룡국은 태자가 있는 구 도읍으로 선물을 보냈다. 물론 기록이 없으니 이하에 서술할 당시의 상황과 관계와 역할 등에 대해서는 추론에 맡길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당시 화친은 맺었으나 사실상 부여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황룡국은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던 곳으로 보이는 졸본으로 태자에게 선물을 보냈다. 물론 도절태자가 죽을 때 탁리와 사비를 제거했던 것으로 봐서 극단적인 강경파들은 어느 정도 제압된 상태였을 것이고, 남은 중도 강경파를 해명태자가 졸본에 남아서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따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유리왕은 처음 부여의 대소왕이 도절태자를 인질로 한 화친을 요구하기 전에 고구려의 변방을 약탈하던 선비족을 토벌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던 전적(前績)이 있다. 이로 보아 유리왕은 맹목적으로 평화만을 외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유리왕이 해명에게 자살을 명하면서 언급한 내용 중에 “나는 도읍을 옮겨 나라를 튼튼히 함으로써 백성을 편안히 하려 했는데”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리왕은 도읍을 옮기고 내실을 다져 힘을 키우면서 주변 나라들과 힘을 모아 부여에 대적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 주변 나라 중 하나였던 황룡국과의 외교에서 해명태자가 힘을 과시하여 관계에 흠을 낸 일과 어떤 이유에서든 유리왕이 버리고 떠난 구 도읍에서 오히려 민심을 모으고 있던 것을 마음에 들지 않게 여겨 황룡국 사건을 빌미로 제거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돌아보며]

해명태자는 도절태자에 이은 두 번째 태자이다. 그러니 형이 부왕에게 죽는 것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선례를 두고도 유의하지 않고 힘을 과시했으니 끝내 형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해명태자가 황룡국 사신의 활을 꺾은 사건은 외국의 사신 앞에서 조국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태왕이 아닌 태자가 그런 일을 자의로 행한 것은 분명 월권이었다. 태왕에게도 불충이었으며 사신에게도 무례였다. 맹자에는 ‘오직 어진 자만이 큼에도 작음을 섬길 수 있고(惟仁者爲能以大事小),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작음에도 큼을 섬길 수 있다(惟智者爲能以小事大)’라는 말이 있다. 해명이 황룡국 사신의 앞에서 활을 부러뜨린 명분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업신여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고구려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인데, 선물을 눈앞에서 부숴버려야만 지킬 수 있는 위신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소국을 대함에 있어 덕과 의를 앞세우지 않고 무력을 앞세웠으니 대국의 자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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