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도절태자

고구려 유리명왕의 태자 도절

by 한휼
02_고구려_01_도절-02-20230116_102253.jpg 고구려 도절태자 일러스트


고구려 도절태자(都切太子)

도절태자는 고구려 2대 태왕 유리명왕(瑠璃明王)과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인 왕후 송씨의 장남이다. 기원전 17년경에 태어나 서기 1년에 죽었다. 부왕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잇지 못했다.



[부여의 압박, 그 앞에 선 태자 도절]

도절이라는 이름은 도읍(都)을 갈랐다(切)는 뜻이다. 이로 보아 도절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일 것으로 추측된다. 도절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기원전 6년 1월에 부여 대소왕(帶素王)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체결하고 인질을 교환할 것을 제의했던 때의 기록이다. 부여의 대소왕이 화친을 가장한 협박을 해오던 당시, 도절은 이미 태자였지만 10대 초반의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당시 임금이던 유리명왕은 강성했던 부여를 두려워하여 인질 교환에 승낙함으로써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중국과 맞서 싸우며 위세를 떨쳤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적인 이미지와 달리 초기의 고구려는 이처럼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반면 도절은 부여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탁리(託利)와 사비(斯卑) 등 강경파의 반대가 많아 결국 도절을 인질로 보내지 못했고 화친을 이뤄지지 못했다. 때문에, 부여는 5만여 명의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폭설이 내려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유리왕, 화친을 향한 계략]

이렇게 고구려와 부여의 1차전은 특별한 결론 없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화친을 원하는 유리왕과 그에 반대하는 강경파는 끊임없이 대립했다. 결국 유리왕은 강경론자들의 대표인 탁리와 사비를 제거하기 위해 교시(郊豕) 사건을 일으켰다. 제사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잡아오게 했다. 이에 그들은 돼지를 잡고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의 힘줄을 잘라 놓았다. 그러자 신성한 제물에 상처를 입혔다는 죄목을 씌워 탁리와 사비는 죽음을 맞게 됐다. 교시 사건이 설화적인 느낌이 나는 것으로 보아 탁리와 사비 등 강경파를 제압한 어떠한 정치적인 사건을 설화로 꾸며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화친을 원했던 유리왕이 강경파의 대표 격인 탁리와 사비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평화와 전쟁, 기로에 선 태자 도절]

교시 사건으로 강경파를 제거한 뒤 이후, 유리왕은 부여와의 화친을 서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10대 후반이 된 도절이 장성하여 강경한 자세로 화친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절은 수수께끼의 죽음을 맞았다. 정확한 사인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화친을 원했던 유리왕의 강요에 의한 자살 혹은 타살로 추측된다. 도절은 부여에 인질로 갈 경우, 돌아오지 못하거나 죽음을 맞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왕의 명령에 거역할 수도 없으니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1년에 도절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서기 3년. 유리왕은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도읍을 옮겼다. 추정하건대 기존 도읍이었던 졸본에는 강경파의 세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도절을 인질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던 강경파와 찬성했던 유리왕 세력의 대립으로 도성의 국론은 둘로 갈라져 분열되었을 것이다. 도절이라는 이름의 뜻을 보면 도읍을(都) 갈랐다는(切) 뜻이다. 이로 보아 도절은 이름이 아니라 죽은 뒤에 도성의 국론을 갈라놓은 책임을 묻는 뜻에서 유리왕이 붙여준 시호일 것이다. 이처럼 도절이라는 이름은 태자가 순순히 인질로 가지 않음으로써 국론이 분열되었다는 유리왕의 불만 섞인 의중이 담겨있던 이름이 아니었을까 한다.



[돌아보며]

왕조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다. 물론 왕의 독단으로 나라의 향방을 좌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 그에 대한 지나친 대립과 이로 인한 국론의 분열은 국가에 좋지 못하다. 도절은 태자로서 왕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그 이름과 같이 나라를 둘로 갈라버렸다. 비록 부여와의 화친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이었다고 할지라도 신하로서 임금과 대립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차라리 순순히 인질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여 부여의 약점을 파악 및 분석함으로써 부여를 무너뜨릴 방책을 미리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보위를 이은 뒤 부여를 대적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아직 보위를 얻지 못한 상태로 그 자리에 있는 부왕과 대립하였으니 끝내 결실을 맺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을 겪을 당시 태자가 10대의 어린 소년이었던 점으로 보아 사건의 흐름이 태자 본인의 의중이 아닌 태자를 등에 엎고 태왕에게 반대했던 강경파 세력에 의해 전개되었고 태자는 그 정치 투쟁의 희생양으로써 죽었을 거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또 임금에게 시선을 돌려서, 유리왕은 잘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소왕은 유리왕의 아버지이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부여에 살 때부터 제거하려 기회를 엿봤던 인물이다. 대소왕은 어떤 명분을 찾아서라도 전쟁을 일으키려 했을 것이다. 또 유리왕 본인도 그런 대소왕을 피해 부여에서 도망 나온 인물이었다. 따라서 대소왕이 정말 화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리왕이 어떤 의중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교시 사건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했던 것을 보면 지략을 갖고 계책을 세울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여와의 관계 역시 나름의 방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반대파를 함정에 빠뜨려 제거하고 아들을 죽음으로 몰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 했던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아들에게 내려진 이름인 도절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것은 태자가 아닌 태왕이었다. 분열된 조직은 흥성할 수 없고 분열된 조직에서 지도자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한쪽에 속해버린다면 그 지도자는 성공할 수 없다. 유리왕이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도절의 후임자인 두 번째 아들 해명까지도 제거함으로써 결국 아들을 둘이나 죽이고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 비정한 임금으로 남고 말았다. 유리왕이 오래된 고구려가 아닌 최근의 조선의 군주였다면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비난받는 군주인 선조와 인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임금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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