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 우거왕의 태자 장항
위만조선 태자 장항(長降)
장항(長降)은 위만조선의 초대 국왕 위만(衛滿)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의 태자이다. 생몰년과 모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항의 이름은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데, 장(長), 장항(長降), 장각(長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의 항(降), 각(䧄)은 글자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옮겨 적는 과정에서 혼동했거나 애초에 외국인인 중국인들의 글자로 적는 과정에서 적당히 실제로 불렸던 이름의 음과 비슷한 글자를 갖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우거왕 시대에 한나라에 의해 왕조가 패망하여 왕위를 잇지 못했다.
[기록된 첫 태자 장항]
장항은 우거왕의 아들이다. 왕조는 위만조선으로, 기원전 194년에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정권이다. 우거왕은 1대 위만의 손자인데 우거왕에 이어서 2대 국왕으로 즉위한 것인지, 아니면 기록되지 않은 위만의 아들이 2대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 우거왕이 3대 국왕으로 즉위한 것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또 어쩌면 왕건이 세운 고려처럼 위만의 여러 아들들이 왕위를 주고받았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추론만 가능할 뿐이고 우거왕이 위만의 손자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장항은 우거왕 때에 한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왕위를 잇지 못했다. 우거왕은 전쟁 중에 암살당했고, 우거왕의 태자 장항은 결국 한나라에 투항하고 백성들을 회유함으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했고, 투항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기후(幾侯)에 책봉되었다. 이후 장항은 한나라의 군현 통치에 반발하여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 참수당했다.
[우거왕 vs 한무제]
우거왕이 조선을 다스리던 시대에 중국에는 무제가 다스리던 한나라(漢)가 있었다. 한나라는 진시황(秦始皇)의 진나라(秦)가 망한 뒤 유방에 의해 건국된 나라인데 중간에 왕망이라는 황제의 외척에 의해 한 차례 멸망당한 뒤 다시 세워지게 된다. 멸망 이전의 한나라와 다시 세워진 한나라를 구분하여 전한(前漢), 후한(後漢)이라고도 하고, 각각 수도의 위치로 구분하여 서한(西漢),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한무제(漢武帝)는 전한의 황제였다. 무제는 침략 전쟁을 벌여 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것을 좋아하는 호방한 인물이었다. 북쪽으로는 흉노, 남쪽으로는 베트남을 침공하였고, 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열었는데 이 또한 북방의 흉노를 대적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리고 조선은 이전 정권부터 왕을 칭하며 중국대륙과 조선 사이에 있던 연나라와 대립하며 위세를 키워가던 차였다. 한나라와 조선 두 나라 모두 국력을 키워가던 끝에 한나라 측에서 기원전 109년에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왕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우거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 한나라의 망명자를 점점 더 많이 꾀어들였고, 아직 들어가 천자를 뵙지도 않았다. 진번(真番) 옆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한,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마침내 우거는 조서(詔書)을 받들기를 거부하였다.”라고 기록하기 있는데, 위만으로부터 우거왕 대에 이르기까지 주변국들과 한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한나라 측에서 우선은 이를 평화적으로 해소하고자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자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전쟁, 화친, 그리고 다시 전쟁]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楊僕)과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주고 수륙병진으로 고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조선은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대항했고 누선장군 양복이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하자 이를 격파하고 좌장군 순체의 수군을 패수 서쪽에서 저지하였다. 한나라 측이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무제는 화친을 제의했고, 조선 측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태자를 보내, 말 5,000필과 군량미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화친은 결렬됐다. 조선의 태자가 1만 병력과 같이 패수를 건널 때, 한나라의 관료 위산이 태자 일행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했고 조선의 태자는 이를 암살을 위한 함정으로 보고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위산은 불필요한 요구를 강요하여 화친을 깨뜨린 책임을 지고 결국 처형당했다.
화친이 결렬되자 결국 전쟁은 재개되었다. 순체는 패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북서쪽을 포위했고, 양복은 성의 남쪽을 포위했다. 왕검성을 포위한 한나라 군대는 왕검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조선의 저항과 더불어 양복과 순체의 갈등으로 왕검성은 몇 달 동안이나 이들의 공격을 저지했다. 조선은 내분으로 우거왕이 암살당하여 한나라의 침공을 방어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조선 내부에서 주화론(主和論)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는데 주화론을 주장하던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_중앙 장관), 한음(韓陰), 장군 왕협(王唊), 니계상(尼谿相), 삼(參_지방 장관 격) 등이 한나라에 항복하며 배신하여 삼(參)이 보낸 자객이 우거왕을 살해했다. 삼은 훗날 다시 한나라를 배신하려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국왕이 사망한 상태에서 성기와 몇몇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태자 장항은 결국 한나라에 투항하였고 이후 이계상 삼과 모의하여 끝까지 항전하던 성기를 죽임으로써 조선은 멸망했다. 이 공으로 태자 장항은 하동(河東)을 식읍으로 받고 기후(幾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도(韓陶)는 적저후(荻苴侯), 왕협(王唊)은 평주후(平州侯), 이계상(尼谿相) 삼(參)은 홰청후(澅淸侯),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온양후(溫陽侯), 또는 열양후(涅陽侯)에 봉해졌다. 장항이 받은 하동군 기현(幾縣)은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낙양이 있는 사례교위부, 즉 지금의 산시성 하동(河東)의 현(縣), 또는 허베이성의 어느 지역을 가리킨다. 장항은 이후 반란을 일으키다가 처형되었으며, 기후국(幾侯國)은 폐지되었다. 또 홰청후 삼은 기원전 99년에 도망친 조선인 포로를 숨겨준 죄로 잡혀 투옥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태자 장항]
장항은 생몰년이 명확하지 않아 나이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언급되는 점 등을 보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한, 최소 10대 후반 이후의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장항 태자는 전쟁 당시에 명확한 행적을 보인 것이 두 차례 있었는데 협상 때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돌아가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이 재개된 일과 항복을 주장했던 이들에게 우거왕이 암살당한 뒤 주화파들과 손잡고 끝까지 항전했던 성기를 제거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일 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일을 보면 서로 성격이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주전파의 모습이고 후자는 주화파의 모습이다. 그러면 일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원한 인물이었는가 하면 조선이 멸망한 뒤에 독립을 꾀하다가 끝내 처형당한 것을 보면 또 그렇게 보는 것도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기록이 많지 않아서 장항이 각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고 기록된 사실 역시 승자인 한나라의 기록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된 사실로만 추정했을 때 아마도 장항은 현실에 타협하면서 기회를 봤던 것으로 보인다.
[패배자 장항]
우리는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과 유사한 경우를 알고 있다. 바로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인 병자호란이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때 협상이 결렬되지 않고 우거왕이 항복 의식을 행하고 전쟁을 멈췄다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처럼 고조선 역시 유지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라가 유지되고 정권이 유지되었다면 복수의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역사처럼 병합된 상태로 독립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허무하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장항이 항복에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거왕 암살에도 동의했는지 또 동참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의 태자로서 정치인으로서 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 역사상 첫 번째로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이자 패배자로 기록되었다.
[돌아보며]
전쟁이 한나라의 승리로 끝나는 과정과 이후를 보면 한나라의 승리 요인은 한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 측에 있었다. 한나라 침공군의 두 대표인 양복과 순체 사이에 분열이 있었고 잠시였으나 조선은 이를 잘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열이 군대 전체의 분열로 이어지지 못하자 조선의 주화파가 내분을 일으켜 항복하여 패망한 것이었다. 또 항복한 이들을 보면 지방 세력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들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조선이 완벽한 중앙집권화가 완성되지 않은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쟁이 일어난 원인도 주변국과 한나라의 직접적인 교역을 가운데서 막아 이윤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장항이 패망 후에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독립을 꾀하지 않고 분봉(分封)받은 곳에서 반란을 모의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 안팎에 조선에 호의적인 곳이 없었다는 것도 추정해볼 수 있다. 위만조선이 흥했던 과정과 망국 이후의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조선은 소프트파워(soft-power) 없이 철기로 무장된 힘과 군사력을 앞세워 이윤만을 추구한 결과 주변이 적들로 가득찼고 결국 어려운 상황에서 손을 내밀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 모범적인 예시는 아니지만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 때 적의를 가득 축적했던 만주족은 적으로 돌변했고 본국도 어려우면서 임진왜란 때 군사를 원조해줌으로써 감복하게 한 조선은 마지막까지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물론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국의 이익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주변을 적으로 가득 채운다면 반드시 그 해악이 닥칠 것이다. 500년을 넘기지 못하면 단명한 왕조로 보는 특이한 시각이 있는 우리에게 시작과 끝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첫 왕조 위만조선은 결국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