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민주
여독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피로나 병
여독을 경험한 적 있는가? 나의 모든 여행에는 여독이 뒤따른다. 누군가는 “단지 네가 그동안 힘든 여행만 한 게 아닐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힘들지 않은, 혹은 좋은 여행을 판단하는 척도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간단히 떠올려보자면 여행지가 얼마나 좋았는지, 힘들었는지, 여유로웠는지, 아름다웠는지, 혼자 떠난 여행인지, 여럿이 함께한 여행인지 정도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소들은 여행 이후 나의 여독 유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나에게 여독은 필수불가결한 ‘무언가’가 된 듯하다.
육체적, 심적으로 힘들었던 여행 뒤에 따라오는 여독은 납득이 된다. 여러 관광지를 보기 위해 쉼 없이 걷는 여행이나 불편한 이와 함께하는 여행. 말만 들어도 진 빠지는 피곤한 여행을 마친 뒤 집에 돌아오면 묘한 해방감과 함께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힘들었던 여행의 마무리를 알리는 여독이 찾아온다. 너무나도 예상할 수 있고 납득되는 ‘여독의 발생’ 시나리오 아닌가?
내가 이해되지 않았던 건 완벽했다고 생각한 여행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독이었다. 일도 하지 않고 돈만 쓰며 놀고 온 여행인데 왜 여독이 있는 걸까? 재충전하고 왔으니 여행 이전보다 활기가 넘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나는 스스로 이 현상을 “집에서의 대회복”이라고 명명했다. 아무리 좋은 곳. 아늑한 곳. 친절한 곳이어도 상관없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내재해 있다면 그곳은 나의 집이 될 수 없다. 곧 떠날 곳이라는 인식 말이다.
나에겐 서울에서의 자취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었다. 학교와 통학이 가능한 지역에 살았기에 입학 후 1년 반 넘게 왕복 4시간의 통학 시간을 견디며 학교에 다녔다. 문득 다른 친구들이 누리는 대학생활을 나는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늘 통학 시간과 막차 시간에 쫓겼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친구들이 놀 때 나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고, 공강과 주말에 하는 동아리 입부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통학하라는 부모님에게 자취를 해야 하는 이유를 시도 때도 없이 열거했다. 부모님은 열성적인 자녀의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나는 2학년 2학기에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생활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을 일은 거의 없었으며, 새내기 때만큼 학과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자취방은 원래 살던 집보다 훨씬 작았고, 녹슨 수전이 거슬렸다. 요리하기에는 주방이 턱없이 작았다. 요리하지 않으니, 배달과 가공식품으로 끼니를 때웠고, 음식물 쓰레기와 벌레가 싫어 집에서 음식을 먹지 않게 됐다.
무엇보다 2년 뒤에 떠날 곳이라는 생각이 무거웠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대청소를 마음먹었다가도 곧, “2년 뒤에 떠날 곳인데 굳이?”라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이면 자취방에서 도망치듯 떠나 집으로 갔다. ‘집에서의 대회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집에서의 대회복은 서울 여행의 여독을 풀어줬다. 처음 자취를 시작한 학기 내내 나는 월요일이면 서울로 향했고, 며칠 간의 서울 여행 뒤 집에서의 대회복을 반복했다.
문득 이 여행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기간은 아직 한참 남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거였다. 그래서 난 굳이 벽면에 LP를 달아 꾸미고, 집에서는 쓰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자취방엔 필요한 가구들을 샀다. 굳이 화장실에 선반을 하나 달았고, 굳이 안 보이는 곳까지 깨끗하게 청소했다. 집안 곳곳에 내 손길이 닿으니 이제는 제법 ‘내 공간’ 같았다. 매주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할 일이 쌓였다. 그래도 자취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마냥 무겁진 않았다. 오히려 산뜻해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서울 자취방에서 ‘집에서의 대회복’을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으면 여전히 나의 대답은 “전혀”다 자취 생활이 익숙해져 여독의 정도가 줄었지만, 아직도 나는 여행 중인 듯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나와 비슷한 감정으로 타향살이를 해 본 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음…
우리 끈질기게 버텨보자. 싫음 말고.
교지원들의 댓글
정원: 정말 공감한 내용이에요 � 저는 기숙사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아무리 충분히 자고 쉬었다고 생각해도, 본가에 내려가서 쉬는 것과는 정말 다르더라고요..아늑한 집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여행 중인 모든 이들 파이팅~ 집에 가고 싶다.
유라: 교지에 들어와서 알게된 것;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고 스펙이더라구요. 저도 겨우 노원구에서 중구로 학교를 통학하면서 큰 피로감을 느꼈는데, 타지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서울촌놈으로서 말 얹기가 조심스럽지만, 다들 서울 안에서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롭고 힘들 땐 교편이 안아줄게요┗( T﹏T )┛교편실이 민듀의 또다른 집이 될 수 있도록 편집장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원: 저도 오랫동안 서울을 여행 중이었네요..! 발붙이고 살고 있음에도 늘 이질감을 느끼는 게 떠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나봐요. 저한테는 학교란 공간도 그렇더라고요. 잠시 있다가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기 전 잠시 머무르는 곳 같아서.. 그래도 이 여행은 참 기니까 좋은 경험들로 채우며, 또 비슷한 여행자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보내야죠! 모두들 여행 화이팅입니다!!!
현아: 여독 없이 몸과 마음이 온전히 편안한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보자구요. 가능하면 여행 중인 지금 이 순간도 즐길 수 있기를~ 파이팅!
민우: 저는 이번 연휴에 본가로 내려갔다 왔는데 뭔가 학기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가 본가에 있으면서도 예전만큼은 편하지 않은 기분이었어요 집으로 잠시 내려가는 것도 여독이 되어버린 걸까요 � 녹록지 않은 순간들이지만 다들 각자의 여독 속에서 본인만의 답을 찾아가 봐요~~
지운: 여독으로부터 말미암은 글에 묘한 찡함이 있을 줄이야 서울살이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수액 맞듯 본가를 찾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 ‘버팀’의 끝이 있을까 무서워질 때가 있더라구요 나중엔 ‘대회복’을 할 집조차 희미해져 있을까봐요 서울이 내 자리 같을 순 없는 걸까요 평생 이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해야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