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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Jan 25. 2021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플라톤 읽기 IV

소크라테스는 선의 본질과 이에 따른 행동이 무엇이고 이들의 보편적 지배 원리는 무엇인가에 일생을 바쳤다. 이에 대해 체계적인 철학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토대를 쌓은 것은 분명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윤리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짧은 단문의 격언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나름대로 도덕적인 체계가 갖추어진 것은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였다. 선대와는 달리 그는 많은 윤리적 경구를 남겼고 그것을 넘어 윤리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지만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에 삶의 목적에 관한 것이나 행복의 본성 탐구가 주를 이룬다. 행복은 물질의 풍족함보다 영혼의 선함에서 찾을 수 있고 배운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그는 절제를 선호하면서도 금욕주의자는 아니었고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을 신조로 삼았다. 행복이란 그의 도덕적 주제는 후대 거의 모든 철학자가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르테(arete)에 대해서 데모크리토스는 탐구하지 않았다. 아르테란 ‘어떤 종류의 탁월성’ 또는 ‘도덕적 덕’을 동시에 의미하여 기술 또는 덕의 중의적 의미가 있다. 덕의 본성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탐구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이다. 적어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경건, 절제, 용기 같은 윤리적 덕목에 관해서 상대방보다 나은 만족스러운 답을 할 능력은 없어 보이게끔 대화는 끝이 난다. 이러한 무지는 국가에서 정의를 논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여기서 대화는 정의가 과연 덕의 대상이 되는가이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에게 특유의 예외적인 질문을 퍼부어 상대방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생각을 깨뜨리는 연속 끝에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예의 그렇듯이 소크라테스는 자기도 정의가 뭔지 그것이 덕의 일종 인지도 모르며,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한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끝을 맺는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관해 확신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 덕목을 지식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기준이 매우 높음을 함의한다. 대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덕목들과 관련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하나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질문한 윤리 문제를 자신의 포괄적인 세계관에 따라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삶이나 제도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 테두리 안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관점에서 윤리를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우주는 질서 정연하며 완전하고 불변하여 완벽히 이성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세상은 이데아의 덧없는 그림자에 불과하여 절대적 가치가 없다. 절대적 가치는 오직 최고선과 관련된 이성만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이성 계발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삶의 궁극적 목표는 영혼이 신체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명상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궁극에 도달하는 방법론을 개인과 국가의 유비 관계를 통하여 설명한다. 국가는 통치자와 수호자, 일반 시민으로 구성되고 이들 각각은 다른 덕이 요구된다. 통치자에게는 지혜, 수호자에게는 용기 그리고 시민은 절제라는 덕목이 그것이다. 통치자는 국가 운용에 지혜를, 수호자는 국가 수호를 위한 용기를, 시민에게는 통치 계층에 복종하는 절제를 덕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조화는 각각의 계층이 자신들의 임무를 적절히 행할 때 이루어질 터인데 이를 정의로 보았다. 


여기서 지혜는 이성이 담당하며 용기는 기개가, 절제는 욕구와 연관된다. 영혼은 이성과 기개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지혜는 이성이 영혼의 다른 충동을 지배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기개적 기능은 이성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용맹하므로 이성의 충고를 수행할 때 용기가 있다. 기개와 욕구가 이성에 복종할 때 절제가 이루어진다. 세 가지 내적 원리가 각각 자기 일을 순조롭게 수행하며 조화를 이룰 때 윤리가 완성된다. 이때 정의가 최고의 덕이 되며 정의의 영혼은 어떠한 악행도 저지르지 않는다. 개인과 국가 덕목의 유비 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살펴본 바와 같이, 플라톤의 윤리는 우주가 그런 것처럼 질서 정연한 영혼으로서 이상적이다. 이것은 신체를 소우주로 대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혜와 용기 및 절제의 상호 조화로움을 통하여 정의의 덕목을 발휘하는 영혼이야말로 이성적 윤리였던 셈이다. 조화는 이성이라는 상위 기능이 기개나 욕구와 같은 하위 기능을 지배하므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이성, 즉 덕의 생활이 최고선이다. 정의는 행복 그 자체이며 쾌락은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욕구가 이성적이 될 때 비로소 욕구의 만족이 쾌락으로 나타난다. 플라톤의 윤리적 관점은 금욕주의적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와 깊은 교감을 맺게 된 연유의 깊은 부분이 바로 윤리학인 것은 이데아의 명상과 신을 보는 것의 진정성이 만나기 때문이다. 이 부분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분명히 다른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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