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의 거리. 신록 사이로 달리며 다시 살아나다

러너스스트릿 #RS_001

by runnersst


해방촌 - 남산도서관 - 명동 - 동묘 - 종로 꽃시장
Cue the music_Sandman by Tai Verdes


봄맞이로 뛰쳐나간 더레이스서울 마라톤에서 PB가 나왔다. 그리고 찰나의 환희와 맞바꾼 신스프린트 부상으로 한 달 가까이 강제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냥 지내도 몸이 근질근질한 4월.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과 살랑이는 꽃잎들이 반겨도 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하루하루 고문처럼 다가왔다. 더 길어질지 모르는 부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온몸을 다해 휴식 또 휴식한 결과 드디어 근 한 달 만에 행복의 주말 달리기로 돌아왔다.


5주 만의 자축을 위해 쌓아두고 벼르던 목적지들을 두근대며 선별해 냈다. 그 언젠가 눈보라 치던 한겨울, 정처 없이 뛰다가 마주한 동묘 시장의 정겨움과 추위를 녹여주던 잔 막걸리의 넉넉한 품을 잊지 못해 새로운 시작은 다시 동묘로부터. 제법 쌀쌀한 새벽 공기에 러닝 쇼츠를 입고 나온 것이 걱정되었으나 괜찮았다. 동묘에 가면 아침부터 나를 반겨줄 푸짐하고 얼큰한 동태탕 한 그릇이 기다리고 있다. 가보자고~



가는 김에 틈틈이 세상 구경을 잊지 않았다. 이왕 다시 시작하는 김에 근육들이 온전히 붙어 있을지 궁금해 무리일 줄 알면서도 언덕길을 강행했다. 해방촌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신흥시장의 멋지게 탈피한 모습이 궁금해 일정에 끼워 넣었다. 지난주 쏟아진 폭우로 인해 아침 공기는 상큼하며 또 눅눅했다. 잔혹한 업힐로 숨이 끊어질 듯 오른 신흥시장 입구엔 문학 전문 서점 ‘고요서사’가 위치해 한때의 문학소녀를 다소곳이 반긴다.


신흥시장은 매우 오래된 시장의 매우 새로운 모습이 무척 인상 깊다. 사방을 가로지르는 철제 프레임들은 마치 공간 전체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몸뚱이 같다. 그리고 그 속에 다양한 세포들이 조밀하게 존재하듯, 집집마다 나도 있다 여기도 봐라 서로 개성을 강렬히 품어내고 있다. 세밀한 센스들을 구경하며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훅 줄어 당황하게 한다. 아직 갈 길이 머니 구경은 여기까지.


볼거리가 많은 신흥시장


다시 가로수 사이를 세차게 뛰어 남산도서관을 끼고돌아 예장 공원을 향해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다. 끝도 없는 해방촌의 살벌한 언덕을 계속 올라서인지 기운이 쭉 빠졌음에도 마음 한편이 두근두근 설레 신나서 내달려간다. 이제 이 길의 끝에, 그토록 고대하던 ‘리사르 에스프레소바’에서 카페인 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또 눈을 반짝이며 동태탕을 향해 뛸 수 있으리라. 일부 여행객들이 아침 관광을 시작하려는 명동 한편에 차분히 자리 잡은 리사르 명동점은 중후함과 산뜻함이 적절히 잘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절도 있으되 친절한 바리스타가 내어주는 스트라파짜토 한잔에 눈이 슬쩍 뜨이고 또 한 잔의 에스프레소에 다시 한번 시작해 볼까나 즐거움이 올라온다. 카페인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리사르 에스프레소바 명동


충무로를 가로질러 뛰다 사거리 신호등에서 숨을 고르며 둘러보니 명보 사거리다. 20대에 수도 없이 지나쳤던 그 거리에 다시 서니 기분이 괴상하다 눈물도 조금 나는 거 같기도. 그나저나 신흥시장에서 다 털어 쓴 배터리 문제로 오늘의 피날레인 광주식당까지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엄습한다. 청계천을 쭉 따라 동묘까지 가면 그때는 물어 물어라도 찾아가겠지 싶다. 방향을 틀며 눈물도 삼켜 넣고 다시 속도를 내본다. 이제는 앞을 막는 신호등도 추억으로 망설일 일도 없어 보이니 쭉 전진이다. 동대문 시장엔 이미 일요일 장이 분주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치고 줄지어 늘어서 있다. 아마 동묘는 이미 바글바글할지도 모르겠다 싶으니 설렘이 가득하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광주식당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섰다. 중간중간 놀며 쉬며 뛰었더니 숨도 차지 않고 땀도 다 식어서 다행이다. 위장이 바로 밥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이제 어서 누구든지 일어나면 내 자리다.



여기저기 아침 동태탕에 소주 한잔 들이켜는 어르신들의 국밥 추임새가 들려 재밌다. 한잔하고 싶지만 달리고 바로 마시는 술이 그렇게 안 좋다니 추운 눈보라 퇴치용이 아닌 이상 참기로 한다. 동태탕은 듣던 대로 아주 시원하고 맛있다. 모든 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하다. 왜 소주 1병씩 놓여 있는지 알 것 같다. 이건 해장하며 해장술을 부르는 한국인의 밥상 그 자체. 엄청 크고 부드러운 동태살, 그와 경쟁하듯 두툼하게 썰려진 두부와 푹 익은 무 조각들에 홀려 밥을 뜰 겨를도 없다. 이 집 찐이네. 숨은 맛집들을 찾아 또다시 정처 없이 거리를 뛰어다녀야겠다.


봄꽃 모종으로 알록달록 곰살맞은 종로 꽃시장


두둑이 배를 채웠고 다리도 쉬었으니 이제 소화시키며 뒤늦은 쿨다운이다. 창신시장의 다양한 에스닉 레스토랑과 미니 마트를 어슬렁 기웃대며 최종 목적지인 종로 5가 꽃시장에 도착. 파슬리 모종을 구하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바질 두 덩이만 품에 안은채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내 두 다리로 즐기는 이 소박하고 땀내 나는 행복감을 과연 무엇이 대신할 수 있을까. 캘린더와 카카오맵에 빽빽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의 즐거움들. 모두 내 두 발로 훑기 전에는, 이제는 더 이상 부상은 없다. 다음 주엔 파슬리를 다시 찾으러 가보자.


IMG_0151.JPG 남산 가로수길


오늘의 즐거움 길이 9.3km.

세계의 문은 언제나 거기 존재한다.

나는 열기만 하면 돼.


다음 주말은 바다마라톤이다. 그리고 또 거리의 하이에나가 되어 어슬렁거려야지. 낯선 거리의 새로운 것들이 전해줄 즐거움에, 문득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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