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스 스트릿 #RS_002
바다의 날 마라톤 10Km: 상암 평화의 공원
Cue the music: King Gnu_Boy (*Live Ver)
토요일 이른 아침. 바다의 날 마라톤을 뛰러 가는 길, 빗방울이 살짝씩 떨어진다. 오늘은 우중런인가 싶어 멍하니 앉았다가 갈아타야 할 역을 지나쳤다. 제시간 도착은 이미 틀린 듯하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앞에 보이는 정류장 의자 위 문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오늘 첫 출발인가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지금의 마음을 잘 기억해 두세요. 나중에 자꾸 꺼내보게 될 테니…’ 마라톤 가는 날, 버스 정류장 의자마저 러닝 트랙이라니. 기막힌 우연이다. 이걸 보려고 돌아가는가 싶을 정도로.
행사장에 도착하자, 2년전보다 훨씬 빽빽한 인파가 나를 압도한다. 마라톤 열풍의 눈에 들어온 것 같다. 출발은 한참 지연되어 도리어 시간이 남는다. 천천히 밀려가는 군중 사이로 출발선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한다. ‘그래, 알아. 나도 신나.’ 그런데 얼마 못 가 병목 구간에서 몇 번이나 제자리걸음을 하다 보니 오늘 기록은 포기다. 그냥 펀런이다, 싶어 마음을 비우고 음악에 맞춰 흥을 올리고 푸르른 나무들도 구경하며 거북이처럼 나아간다.
느긋하게 뛰다 보니 어느새 코스 절반을 넘겼다. ‘왜 이리 안 지치지?’ 생각해 보니 평소보다 페이스가 꽤 느리다. ‘이러다 제시간에 도착은 하려나?’ 그래도 괜찮아.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멸치 한 봉지다. (바다의 날 마라톤의 완주 기념품은 멸치. 맛있고 실속 있어 좋다)
코스의 2/3쯤, 슬슬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 사이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경쾌하게 뛰어가는 한 소년이 보인다. 오늘의 마라톤 개시곡인 King Gnu의 ‘Boy’의 가사가 그 모습과 겹친다.
‘달려라, 아득히 먼 곳으로
더러워진 신발과 발자국은
분명히 미래를 향해
지금 달려 나가
가쁜 숨을 내쉰 너는
누구보다 멋져’
저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며 뛸까. 첫 마라톤일까, 익숙한 코스일까. 궁금하지만 방해할 수는 없다. 그저 각자의 길을 내며 달려가는 것뿐. 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동기로, 리듬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록이 뭐가 대수냐. 이 건강하고 활력있는 에너지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 - 그러나 각자 -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문득 벅차오르고 조금 울컥해진다.
1km쯤 남기고 평화의 광장으로 진입한다. 코스가 확 트이고, 귀에 쿵쾅 울리는 King Gnu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을 더한다. 이제야 원 없이 달려본다. 긴장 없이 뛰었더니 숨이 차지 않고 다리도 피곤하지 않다. 멸치와 메달을 받아 들고 나니 조금은 허탈하다. 느긋하게 조깅했으니 피곤해할 것도 없지. 기록을 확인해 보니, 어라? 이게 맞나 싶다. 지난번 PB보다 4분 느리다. 다시 확인해도 정확히 4분 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경기가 훨씬 편하고 홀가분하고 즐거웠다.
엘리우드 킵초게가 말한 ‘천천히 달릴 수 없다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없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역시 고수의 말은 믿고 보자. 그저 음악 듣고 느긋하게 달렸을 뿐인데, 이토록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니. 이 나이에 선수될 것도 아닌데 왜 그리 기를 쓰며 달렸을까. 이런 식이라면 9월의 하프 경기도, 한여름의 LSD 연습도 두렵지 않다.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던 아침. 나는 마라톤의 본질을 살짝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다. 정류장 의자가 말했던 것처럼 - 이날의 감정은 분명 자꾸 꺼내 보게 될 것이다.
역시 멸치 받으러 오길 잘했어. 내년의 멸치는, 하프로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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