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광기, 오른발 왼발

러너스 스트릿 #1 / RS_003

by runnersst
이태원 > 리사르 약수 > 청계천 > 청량리 > 세종대왕 기념관 > 홍릉 시험림 (12.5km)
Cue the music: Millennium parade_Work (*Live Ver) + Cool down: 홍릉 시험림의 새소리


5월은 유혹이 많은 달이다. 바람이, 온도가, 햇살이, 그리고 나무가 자꾸 밖으로 이끌어낸다. 일주일 동안 들뜬 마음을 겨우 참아내고 다시 주말 달리기 시간이다. 오늘은 홍릉 시험림까지 가보기로 한다. 5월 끝자락의 신록들이 넘실거리며 반기겠지. 가보자고.


러너스 스트릿 #RS_003_1.JPG 밤이 지나간 이태원의 거리


숲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태원 업힐부터 해치워야 한다. 토요일 이른 아침의 이태원 거리는 젊음을 하얗게 불태운 연기로 매캐하다. 아침 해를 보며 클럽에서 느릿느릿 나오는 피 끓는, 아니 피가 끓어올랐을 청춘들이 길거리를 배회한다. 그 틈에 깨진 샴페인 병이 무심히 아우성을 지른다. 저 유리 조각들은 어떤 이야기를 안은 채 산산조각 났을까. 이젠 밤의 이야기 자세히 몰라도 괜찮다. 그 대신, 새벽의 발소리로 나만의 소음을 거리에 더해본다.


러너스 스트릿 #RS_003_2.JPG 조선 순라꾼과 도둑들이 숨바꼭질 하던 버티고개


젊음에 대해 생각하며 한강진 거리를 지나 푸르름이 반기는 버티고개 길로 진입한다. ‘버티라’고 버티고개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1차 목적지인 ‘리사르 약수’를 향해 가볍게 나아간다. 궁금해 찾아보니, 조선 시대 순라(야간 순찰대)꾼들이 도둑을 쫓으며 “번도!”라고 외친 것이 “번티>버티”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도둑 잡는 순라꾼처럼 집중해서 속도를 내본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지나쳐버렸다. 발소리에 빠져 나아가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다.


러너스 스트릿 #RS_003_3.JPG 리사르 에스프레소바 약수


되돌아간 리사르 에스프레소바는 손님들이 분주하게 들고 난다. 역시 본점인가. (리사르는 대부분 일찍 오픈해서 좋다. 아침의 카페인 하이에나에게 선물 같은 장소다.) 목마름도 뒤로 한 채 연거푸 두 잔을 들이붓는다. 단정히 줄지어 선 빈 잔들을 보며, 목을 축인다. 저 잔들이 언젠가 내가 마셔 나갈 에스프레소들이라고 해도, 부정은 못 하겠다. 적당히 해.


러너스 스트릿 #RS_003_4.JPG 런런런


연료 충전 완료. 이제 다음 연료를 향해 가보자. 청량리에서 해장국이 기다리고 있다. 청계천을 끼고 오래된 거리를 기웃거리며 달리다 급히 정지한다. 이게 누구야. 말과 함께 달린다고? 말도 여인도 다 생기 있는 생명력을 향해 달리는 게 아닐지 생각해 본다. 나도 그 생명력을 따라 뛰어본다.


초여름 날씨에 땀을 너무 흘렸는지 어지러움에 눈앞이 핑하고 돌아, 토마토 사탕을 급히 입에 물으니 진정된다. 이렇게까지 준비할 건 뭐야 싶었는데 집요해서 다행이다. 사탕이 다 녹을 때쯤엔 국물로 염분을 추가 보충할 수 있으니 완급조절하며 달려 나간다. 분주한 경동시장을 지나니 금세 청량리가 나온다. 이제, 국물 타임이다!


러너스 스트릿 #RS_003_5.JPG 청량리 장터해장국


해장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으니 부러운 것 없는 아침이다. 땀에 흠뻑 젖은 생쥐 꼴로 뜨끈한 국물을 홀짝이니 시원하다. 이건 더운데 뜨거워서 시원한 거지. 나는 한국인이니 더 시원한 거다. 간이 슴슴한 편이라, 우거지와 함께 먹으니 술술 들어간다. 성공적인 탄단지 보충이다.


신나게 뛰고 마시고 먹었으니, 오늘의 쿨다운 코스 홍릉 시험림으로 가자. 홍릉근린공원의 담벼락 너머 일렁이는 푸르름을 힐끗거리며 나아가니 기분 좋은 리듬감이 생긴다. 그리고 담벼락 끝엔 예상하지 못한 반가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종대왕 기념관’. 표지를 본 순간, 한글런 마라톤을 등록해 둔 걸 잊고 지냈다는 게 문득 떠오른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선다.


러너스 스트릿 #RS_003_6.JPG 킹세종


10월 9일, 한글날과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해 달리는 것이 흥미로워 장소가 ‘세종시’임에도 그냥 저질렀다. 달려봐야지. 한번은. 기록 칩도 없는 부담 없는 펀런이다. 심지어 기념 티도 예쁘다. 다시 올려다본 킹세종의 오른팔이 마치 나에게 길을 내주는 거 같다. “달리거라, 후손아. Run”


러너스 스트릿 #RS_003_7.png 2025년 10월 9일, 세종시, 한글런 마라톤


마라톤 생각에 들떠, 내적댄스를 추며 진짜 마지막 목적지로 향한다. 20년 전쯤에 방문하고 처음이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그때의 아늑하고 고요하던 그 느낌은 그대로일까. 단정히 정리된 숲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어폰은 의미가 없어진다.


러너스 스트릿 #RS_003_8.JPG 고요한 침묵의 대화 중


사방에서 들리는 청량한 새소리에 박하잎을 입에 문듯 금새 상쾌해진다. 쿨다운 하기에 이렇게 완벽한 장소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한참을 숲에 빠져 망중한을 즐기다 보니 군데군데 눈길이 간다. 숲을 바라보는 것에 푹 빠져 물아일체가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옆에 누가 지나가도 모르고, 심지어 뒤에서 도촬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복작복작 바쁜 대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그들만의 뜨거운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뒤돌아 다른 길로 발길을 돌린다. 한껏 집중 중인 등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뭔가 낯이 익다. 이 남다른 경험의 감회를 뭐라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나름 결론을 내려봤다. ‘은은한 광기의 세계’로의 회귀가 아닐까.


러너스 스트릿 #RS_003_9.JPG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길


빠져봐야 알 수 있다. 내 세계가 얼마나 찬란한 색들로 물들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수많은 길이 열린다는 것을. 오늘도 은은한 광기를 품고 거리에 나섰다. 12.5Km. 땀은 이미 식었지만, 열정의 땀은 한참 분출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당분간은 오른발 왼발 달려 나가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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