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세, 그리고 11.7km로 얻은 절대적 고요

러너스 스트릿 #1 / RS_004

by runnersst
레이스먼트 가로수길 > 공차 선릉역점 > 도곡한우소머리국밥
Cue the music: 김현철과 드래곤포니 - 봄이 와 (*Live Ver) + Cool down: 선우정아 - 뒹굴뒹굴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눈으로 마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건 거리도, 나무도, 내 안의 숨결도 마찬가지다.



지난 밤 치킨 파티로 몸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도곡한우소머리국밥을 향해 토요일 아침 공기 사이를 가르고 나아간다.

이미 환하게 반짝이는 새벽 한강 윤슬을 타고 훌쩍 다가온 여름이 인사한다.

이전부터 궁금했던 ‘레이스먼트 가로수길’을 지나쳐 가보기로 한다.

오늘은 커피고 뭐고 다 생략. 목적지까지 그냥 직진이다.

3개월 뒤의 하프 마라톤을 위해, 슬슬 긴 호흡의 달리기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아무도 없는, 문이 닫힌 상점가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오랜 취미다.

존재는 없고, 사람의 온기만 남아있는 경계선.

그 묘한 분위기를 탐닉하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역시나 문이 굳게 닫혀있는, 그래서 더 좋은, 레이스먼트 매장은 러닝 전문샵 답게 글도 멋지다.

Keep on running - move forward.

“Yes, sir!” 흐믓하게 뒤돌아 지령을 받들러 나아간다. 꿈에도 모를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가로수 길을 끝으로 시작된 완만해 보이던 업힐은,

사실 단지 길의 폭이 넓고 차선이 많아서 그렇게 보였을 뿐, 연달아 이어지는 지독한 언덕들이 쓰리 펀치를 날린다. 기진맥진하다. 어제 치킨 먹길 참 잘했지.


첫 번째 언덕에서는

‘훈련이다’ 싶은 기쁨과 반가움.

두 번째 언덕에서는

‘내가 왜 이짓을 하지’ 싶은 자책과 회의.

세 번째 언덕에서는 무념무상.

이제는 다리만 움직이고 나는 그 다리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언덕이 더 있었다면, 그건 아마 다른 차원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마주칠 그 언덕들을 훌렁훌렁 넘길 수 있을때까지 전진이다.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데,

’Save water, drink wine’이라니…절묘하다.

프랑스 메독 마라톤이 생각난다.

물 대신 와인을 급수하며 달리는 마라톤이라니.

기분은 꽤 좋겠지만, 완주는 글쎄…

흥청망청, 덩실거리는 낭만 마라톤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그 낭만이 현실이 되기를.

지금은 일단, 눈앞의 역삼동 업힐부터 해치우자.



반복되는 업힐로 한바탕 너덜너덜해진 몸.

이제서야 조금 가벼워진다.

늘씬하게 빠진 역삼동의 고층건물들 사이,

불쑥 책더미가 반긴다.

Humanitas;인간다움 & 百年大計;백년대계.

조금은 삭막해지려는 찰나,

책장을 후루룩 넘기듯 마음 한가운데 훈풍이 분다.


공차의 밀크티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들떴지만,

10시 이후 판매라니. 이내 고개가 툭 떨어진다.

보이는 대로 털썩 앉아버린 버스 정류장.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은 공차가 오히려 고마워진다.


탁 트인 텅 빈 도로를 마주보며 문득 깨닫는다.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카페의 러닝 축하 파티로,

언제부턴가 날 것 그대로의 모퉁이들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 이대로, 여기서

아주 좋은 상태다.

내가 치유받아야 할 대상은

세련된 인테리어나 에어컨 바람이 아니었다.

잠시, 나로 머무는 고요한 시선.

바람결에 자연스레 식는 땀내.

그게 필요했던 것 같다.



확실한 기분 전환을 포상처럼 안고,

덩실거리며 다시 발을 뗀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

건물 사이 불쑥 보였던 그 글이 눈에 밟혀 되돌아간다. 아까의 정류장 의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그 절대적 침묵 속에서 잔잔히 흐르던 리듬감.

어쩌면 오늘, 나는

내 음악을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듬도 침묵도, 일단은 식후경이다.

감상은 잠시 미뤄두고, 서둘러

도곡한우소머리국밥집에 들어간다.

펄펄 끊는 담백한 국물에

청양고추 한 스푼, 다데기 한 스푼.

쿨럭거리며 연신 떠먹는다.



침묵이고 뭐고.

“아, 오늘 재밌었어. 또 뛰러 가자, 다음 주의 나 자신!”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몸이 무겁고 마음이 눅눅할 땐,

그저 가보면 된다.

가보세.

오늘의 가본 거리, 총 11.7km.


가야만 알게 되는게 있고,

봐야만 볼 수 있는게 있는 것 아닐까.


이번 토요일에 달릴 ‘긍정의 힘 마라톤’을 통해

또 무엇을 알게 되고, 보게 될까.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리듬을 따라 달려왔다.

마치 어린왕자의 여우가 된 마냥,

월요일부터 토요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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