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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Aug 25. 2024

일부일처 vs 알파메일

구: 우선 저는 종교적 원리주의자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성생활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토론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왜 불교에서 스님들에게 성적인 금욕을 요구하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사회자: 오래된 계율이기 때문입니다. 원시경전 부터 아함경까지 성적 욕망을 주의할 것을 말하는 구절은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 맞습니다. 그러나 성적 욕망에 대한 구절이 어디에 써 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왜 성적 욕망을 강조했느냐겠죠. 그것은 불교의 지향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 즉, 깨어있는 상태를 지향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서 불필요한 고통을 받지도 않고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상태말입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을 깨어 있게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갈등입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고행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마음 속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방석에 앉아서 염불을 왼다던가, 폭포수 밑에 앉아서 명상을 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늘 위에 앉고 폭포수를 머리에 맞음으로서 본능과 이성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통해 본능과 본능을 지켜보는 나 사이에 거리감이 형성됩니다. 그럼으로서 지켜보는 자로서의 나는 본능적인 나와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곧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대신 생각하는 관찰자로서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일에든 적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바늘 위에 올라가는 일이 극도로 두렵겠지만, 인도의 경력이 긴 고행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바늘 위에서 24시간 생활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바늘 위에 올라가는 일은 마음 속에 갈등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늘 위에 올라가는 일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바늘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있고 누구나 시도할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익숙해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본능이 뭐가 있을까요? 성욕입니다. 성욕을 절제할 때, 바늘 위에 올라설 때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욕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목이 너무 마를 때 물을 앞에 두고도 목마름을 참거나, 쉬고 싶은 데도 계속해서 일이나 공부, 독서를 하거나 격한 운동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도 계속해서 운동을 이어나간다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갈등은 에너지가 됩니다. 물론 갈등을 만드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고 상황에 따라 성욕보다 강렬하거나 유익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수 십년 간 끊임이 없는 강렬한 에너지라는 점에서 여러 수행법에서 강조되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무작정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갈등이 만드는 에너지는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에 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당신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욕을 참는다면 당신이 성욕을 참아서 생기는 에너지는 하느님에게 귀속됩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하기 위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남들의 시선 때문에 성욕을 참는다면 그 에너지는 남들의 시선에 귀속됩니다. 그 말은 곧 그 에너지는 당신이 남들의 시선에 따라 행동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성적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성적 욕망이 당신을 더 나은 목적을 위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 너무 이상적인 말입니다. 성욕을 절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당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고, 돈도 없고, 있어도 제대로 쓰지도 못합니다. 


성욕을 대놓고 인정하는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활력 넘치고, 당당하고, 돈도 잘 법니다. 왜 일까요? 그 사람들은 당당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성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이성의 본능적인 선택권을 존중하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혼자 자기 만의 세상에 빠져있거나 업계 밖에서는 관심도 없는 것에 집착하는 대신 본질적인 세상의 평가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성선택이라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나 어설픈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는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당연히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이 당신에게 무언가 개선할 점이 있다는 점을 시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종교적 혹은 도덕적 순결입니다. 종교적인 이유를 대며 성선택에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두려움인데도 말이죠. 


구: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성욕의 갈등이 만드는 에너지를 올바르지 못한 곳에 귀속시킴으로 인한 문제입니다. 만약 두려움을 이유로 성욕을 절제했다면 그 에너지는 두려움에 귀속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 전반에 있어 두려움의 영향력이 커질 수 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위축되고 새로운 시도를 겁내게 되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줄어들겠죠. 만약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여전히 성욕이 강력한 잠재적 에너지이며 당신을 나아지는 길로 이끌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욕을 절제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적 만족이라는 것은 사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섹스를 할 때마다 한 번 사탕을 핥는 것이라고 비유해보겠습니다. 체감되지는 않겠지만 섹스를 할 때마다 사탕은 줄어들 것이고 언젠가는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혼전에 이미 사탕을 녹여 없앴다면 결혼 관계에서 오는 달콤함 역시 없을 것입니다. 결혼의 결속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죠. 


또 사탕의 단맛이 너무 익숙해지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됩니다. 불륜, 하드코어 플레이, 난교 등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자극이 아니면 성적 만족을 쉽게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행위나 수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보는 것이나 화면을 통해 보는 것, 상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사탕을 녹여 먹는 일이고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만드는 일입니다.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철학자 사르트르 부부처럼 서로 자유로운 혼외 관계를 허락한다거나, 성인끼리 합의하에 어떤 성적 관계를 맺든 상관이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건전하고 일반적으로 화목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성적으로 무절제하게 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트: 물론 음란물을 보면서 성적으로 무절제해지는 것을 권장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 현실에서 성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당신은 타인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하고 매력을 갖춰야 하며, 사회적 시선과 낡은 도덕적 가치보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욕이 당신을 자연스럽게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이끌어줍니다. 


만약 누군가 성욕을 정말로 절제해서 대단한 일을 해낸다면 저는 그것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욕을 절제한다면서 뒤에서는 딴 짓을 하거나, 제대로 절제하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하고 이도 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게 현실입니다. 그만큼 성욕을 절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서 성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어지면 오히려 성적인 욕망에 덜 끌려다니게 됩니다. 


만약 절제를 하고 싶으면 해도 됩니다. 확실한 목표가 있고 의지가 있다면 욕망을 참을 수도 있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어설프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안하니만 못합니다. 어설프게 했다가 실패하거나 흐지부지되면 자기 불신과 죄책감만 커질 뿐입니다. 


제가 제일 혐오하는 건 욕망을 나쁜 것처럼 취급하는 행태입니다. 욕망에는 잘못된게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인생을 살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활기 차게 만들어주는 게 욕망입니다. 욕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욕망이 도덕과 사회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대로된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다룰 것입니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 집착해 본질을 잊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문제는 욕망을 죄악시하고 그 때문에 쓸데 없이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고 그와 함께 흔한 문제가 욕망에 집착해 반사회적이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욕망을 쓸데 없이 억눌러서도 안되고, 욕망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그 외에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욕망을 절제하든 욕망을 직면하고 자신을 발전시켜나가든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또 주의해야 할 점은 흔히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불필요한 일관성을 강요함으로서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린다는 점입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욕망을 억제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목표를 이루고 나면 욕망을 억제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욕망과 싸울 이유가 없어진 이후에도 욕망과 싸웁니다. 확고한 목표를 등에 업고 욕망과 싸우는 것과, 이유도 모른 채 욕망과 싸우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도 모른채 욕망과 싸운다면 쉽게 패배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불신과 죄책감이 따라올 테고요. 욕망을 절제하는 것 자체는 좋을 것이 없는 일입니다. 욕망을 절제함으로서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힘을 얻게 되기 때문에 욕망을 절제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유도 모른채 욕망을 절제해서는 안 됩니다. 한 때 욕망을 절제했더라도 다시 욕망에 따라 살 줄 알아야 하고. 한 때 무절제하게 욕망을 따라 살았더라도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욕망 앞에서 갈등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욕망이 흔히 반사회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아주 흔한 욕망입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욕망의 대부분은 그 본질을 살핌으로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의 본질은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분노 혹은 두려움의 감정을 지성과 통합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식의 욕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적절한 상대와 혹은 부적절한 방식으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욕망의 본질은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한 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 잘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욕망에 감응해 그것을 도와주는 것에 잘못된 점은 없으나 타인의 파괴적인 욕망에 휩쓸리거나 타인의 욕망에 원시적인 방식으로 감응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폭력과 섹스는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를 원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현대인은 그것을 원시인이 아닌 현대인으로서, 현대인을 넘어 현명한 사람으로서 다룰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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