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는 이리 오지 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 없으니 나오지 말라는 얘기야. 알다시피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네만, 그냥... 정치권에 얼씬 대지 말고 내려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게."
그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 자신이 머물고 있는 관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을씨년스러운 적막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사람의 부재에서 나오는 적막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방금 문을 열고 들어선 그를 포함해 네 명의 일가족이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나 같이 굳은 표정에 서로를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듯이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눈빛. 흔히 보기 힘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각자 자신의 지위에 맞게 말끔히 차려입은 복장. 1960년의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가구와 장식품이 즐비한 이 곳의 분위기는 정적의 기괴함을 더해주었다.
잠시 이틀 전으로 돌아가보자. 그 때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원망과 분노, 절망이 담긴 고성이 오가긴 했으나 그것은 지금의 적막을 놓고 보면 천사들의 합창같은 아름다운 분위기에 비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가야지. 아니면 돌 맞아 죽자는 거야? 지금이라도 대통령한테 얘기해서 같이 가자고 해!" 안경 낀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그녀의 남편이 대답했다.
"왜 못해? 이게 우리 탓이야? 영감 아니었으면 우리 잘 먹고 잘 살았어. 오늘 당장 얘기 해. 우리도 같이 하와이든 어디든 가야겠다고."
그녀의 날 선 말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갑작스러운 총성이었다. 방에서 들리는 총성에 그들은 갑작스럽게 대화를 멈췄고 남편 되는 사람이 방문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
"무슨 일이냐? 괜찮은 거냐?"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둘째 아들이 서 있었다. 총을 든 채로. 그리고 그 총구가 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뭐하는 거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총구를 약간 옆으로 옮긴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안경 낀 중년 여성의 왼쪽 팔 끝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정적은 총성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온 첫째 아들이 관사에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몇 마디의 대화 후, 다시 네 명의 가족의 을씨년스러운 정적은 이어지기 시작했다.
만 하루가 넘게 지난 뒤 정적을 깬 것은 첫째 아들의 전화 통화였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물었다. "정말 아버님께서 오늘 이화장으로 가시느냐?"
그는 약간의 실망감이 담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이내 실망감은 사라지고 다시 얼굴엔 익숙한 듯이 무거운 무력감이 깃들었다.
그는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관사의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둘째 동생이 잠이 든 채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진작에 수면제를 먹은 상태였다.
그는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것만 같은 어머니가 비록 몇 초 차이일진 몰라도 가장 먼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발사된 총알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숨통이 끊어지는 대신 찰나의 고통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다음으로 아버지의 심장이 아닌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고 발사했다. 그 다음은 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 한 자루를 더 꺼내 양손으로 리볼버를 들고 자신의 왼쪽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겨눈 채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