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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암 Sep 30. 2015

단편소설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

  수진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걸었다. 버스로는 네다섯 정거장이지만, 시간당 몇천 원 밖에 받지 못하는 그녀는 삼사십 분을 걸어 집으로 갔다.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님의 원조도 일절 없었고, 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돈' 때문이 아니라, 삶의 여유와 가벼운 산책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을 했다. 그녀는 조금 먼 길이지만, 항상 공원을 통해 집으로 갔다. 공원의 작은 소나무 옆 벤치에서 십분 정도 앉았다가 집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그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어제 벤치 앞을 지나가던 그 남자가 오늘도 나타나 그녀 앞을 지나쳐갔다.


  수진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또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방송으로 보여지기 위해 혹은 그들의 이미지를 팔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포장하고, 연기하는 그들의 껍데기만 좋아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경멸했다. 그러나 그 무리 속에서 소리 내 말을 하지는 못했다. 무리에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진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껍데기만 보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그 남자는 지났다. 수진은 언제쯤 그 남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지나갈지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마음대로 그 남자의 성격과 습관, 버릇 그리고 직업은 무엇일지 하나하나 상상했다. 이제는 벤치에서뿐만 아니라, 잠자기 전에도 생각했으며, 일하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이제는 수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수진은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수진은 벤치에 앉아 그 남자를 기다렸다. 오후 4시 10분이 되자 어김없이 나타났다. 천천히 걸어 수진의 앞을 지나갔다. 수진은 그 남자와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랬을 경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혹시나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과 자신의 존재감의 무게가 작아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그 남자와 대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수진은 쪽지를 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평상시보다 일찍 벤치에 나와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벤치에 앉아서 매일 당신이 지나쳐가는 것을 봅니다.
당신애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이 쪽지를 읽는 다면, 내일도 벤치에 있을게요.
- 수진

  

  쪽지를 접어 손에 꽉 쥐었다. 수진은 자신의 심장에 두근거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부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은 했지만, 안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수진 앞으로 남자가 나타났다. 손에 쪽지를 꽉 쥐었다. 남자는 점점 다가오고, 수진은 '어떡하지, 어떡하지? 줄까? 말까?' 짧은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고민하였다. 남자는 지나가고, 수진은 창피함과 패배감을 느꼈다. 내일은 반드시 전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수진은 종일 쪽지를 줄지 말지에 대한 고민과 안 받을 땐 어떻게 할지, 또 받으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를 보냈다. 다시 벤치에 앉은 수진은 초조하게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나타나고, 점점 다가왔다. 수진은 결정을 하여야만 했다.


  수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는 얼굴을 감쌌다. 패배감과 자신의 하찮은 용기를 향해 욕을 뱉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손에 쥔 쪽지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수진은 잠시만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앉아 있는 그녀의 왼쪽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햇살과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여 수진은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수진의 앞을 지나가던 그 남자였다. 그의 손엔 캔커피 두 개가 들려져 있었고, 남자는 말없이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다. 수진은 당황했다. 남자가 왜 나타났으며, 지금 일어나는 상황은 무엇인지, 그저 이 상황에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쪽지를 전해주지 않아도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마음 한편의 설렘과 두근거림이 밤하늘의 폭죽처럼 퍼져갔다.


  두 사람 다 말없이 캔커피를 마셨지만, 모든 이야기를 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수진도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막상 그 순간에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어색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렇게 커피를 다 마실 때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진은 그 남자의 눈빛으로 '우리 걸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빛과 표정은 인류 최초의 소통 수단임과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대화의 매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벤치에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두 세계가 나란히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이 떠난 빈 벤치에 한 커플이 왔다. 남자와 여자는 시종일관 표정이 어두웠으며 서로를 향해 화가 나 있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고성이 오갔고, 남자와 여자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한 세계가 둘로 나뉘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기태는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여, 밖으로 나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학 시절 그는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각종 선배와의 모임, 교수님이 부르는 자리, 동기들이 부르는 자리라면 물불 안 가리고 갔다. 학점은 안 나와도 자신의 인맥이라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은,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가끔 불러준다고 해도 기태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기태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저곳 취업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냈지만, 서류심사에서 대부분 떨어졌고, 가끔 운 좋게 서류에서 붙어도, 면접에서 떨어졌다. 자신감이 문제라고 기태 스스로 생각했다. 웃긴 것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자신감은 점점 작아갔다. 더욱 취직이 힘들게 느껴졌다.


  공원을 걷는데, 좀 전에 다녀왔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최근에 자신을 향해 웃어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사연으로 아르바이트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 앞을 지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벤치에 나타났고, 남자는 매일같이 그녀 앞을 지나갔다.


  기태에게는 용기가 필요했으며, 상처받은 세계를 치유할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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