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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hyun Kim Aug 07. 2020

각자의 성장통

11살 때 나무에서 떨어졌다. 내 기억으로는 3.5미터 정도 높이였던 것 같다. 프랑스 학교에서 하계 캠프를 하던 중이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응급실이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눈을 가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취를 위해서 마스크를 차고 숨을 크게 쉬었는데 속이 매스꺼워 수술실 바닥에 토했다. 내 오른쪽 이마에는 그 때 꿰맨 수술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더 큰 문제는 깁스였다. 오른쪽 무릎 밑부터 배까지 감싼 딱딱한 깁스는 11살의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불편이었다. 그렇게 3달 동안 지비행기도 탔다. 원이랑 집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는데, 당히 답답하고 서러웠던 것 같다.


16살, 다시 프랑스에 갔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에 멈춰있는 나의 프랑스어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 현지 중학교에 등교하던 날의 낯설고 이질적이고 두렵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다행히 좋은 환경, 친구들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18살, 한국에 돌아왔다.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서 수많은 새로운 조직과 환경을 마주했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보다는 설렘과 기분 좋은 긴장에 가까웠다. 처음보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느 조직에 가더라도 나는 주눅들지 않을 자신이 있다.


올해 1월, 풋살을 하다가 발목 뼈가 골절돼서 깁스를 했다. 5주 짜리 통깁스였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회사에 출퇴근을 하고 일을 하는데 제약이 거의 없었다. 서러움이 있었다면 서울로 놀러가거나, 술 약속을 못 잡는 점 정도였다. 살다보면 몸이 더 크게 다칠 일도 있겠지만, 그다지 겁이 나지는 않는다. 병원 신세를 지더라도 어렸을 때만큼 답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살아오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큰 사건들을 겪고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비슷한 일들은 시시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성장통을 거친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사건들을 경험하므로, 필연적으로 성장통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다만 예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최근에 일과 관계에서 여러가지가 내외적으로 겹치면서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돌이켜보면 전부 살아오면서 더 크게 겪어온 것들이다. 그런데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해메고 있다.


그런 상태로 친구들이랑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둘째날 밤에 숙소에서 술을 마시다가, 다들 자신의 속사정을 공유했다. 자주 만나는 친구들임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또한 다들 생각보다 괴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음이 놀라웠다.


그래서 내 차례가 왔을 때, 내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날은 말하는 쪽보다는 듣는 쪽이 되고 싶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밝은 친구들이 속으로는 힘겹게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각자의 성장통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사실 내 성장통은 나도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았고, 나는 고민이 많아졌을 뿐, 아주 많이 괴롭지는 않다.


며칠 전에는 해외 파트너에게 채팅으로 싫은 소리를 날렸다. 상대방이 분명히 잘못해서 짚어주고 싶었는데 내 표현방식이 다소 과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하는 그에게, 협력해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며 멋쩍은 수습을 했다. 답답해도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포용하는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성장통을 거치는 중이다.


오늘 저녁을 먹다가 선배들이 내게 요즘 부쩍 고민이 많아보인다며 무슨 일이냐고 추궁했다. 그래서 "고민 없는 삶이 어디 있나요"라고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답변이 스스로 꽤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답을 단순하고 쉽게 내서, 그에 충실히 따르는 고민이 적은 사람들이 부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고민이 많은 게 더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리고 어차피 당장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고민 좀 하는 게 어때서. 자주 성장통을 경험할수록 더 크게 성장하겠지. 그래도 통증이 그다지 아프지 않은 건 어쩌면 살아오면서 조금은 성장한 반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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