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 선수를 비난하는 홍준표 시장에게
이강인 선수가 대표팀에 다시 발탁됐다. 명단 발표 전날에도 이강인 선수의 인성을 비난했던 홍준표 대구시장은 국가대표 경기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유력 정치인이다. 기자들은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는 그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그만한 위상의 정치인이 왜 이강인 선수를 자꾸만 엄중하게 훈계하고 있을까?
선수들이 멋스럽게 입고 연습하는 모습이 낯설지도 않지만 그는 이강인 선수를 “축구장에서 벙거지 쓰고 패션쇼나 하는데… 이길 수가 있겠는가?”라며 옷차림부터 시비를 걸었다. 국가대표다움의 품행을 둘러싼 애매하고도 다양한 입장들이 있을 터인데 그는 “벙거지”와 같은 일상적인 패션조차 “인성 나쁜” 이강인 선수만의 기호로 손쉽고도 능숙하게 연결시켰다.
거침없는 그의 언어는 이강인 선수에게 화가 난 집단을 정치화시키며, 이강인식 품행의 부적절함을 위압적으로 교정시키려는 사회질서에 편승하기도 한다. 정치인이라면 현안을 두고 그만한 목소리를 낼 수도 있겠지만 22살의 축구선수에게 쏟아낸 거친 말이 나로서는 불편하고 민망하기만 하다.
홍준표 시장은 대선 후보까지 경험한 정치인이다. 정치란 것이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뭐든 하는 싸움만은 아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더라도 제3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배짱과 혜안이 가득한 대범하면서도 유연한 정치술도 있다. 그걸 홍준표 시장이 모를 리가 없다. (아니, 어쩌면 모를 수도 있겠다. 지난 대선 후보일 때 그는 수술이 필요한 한국 사회를 위해 대입 수시 전형, 입학사정관제,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등을 모두 제거하겠다고 공약했으니까. 잘못하면 퇴출시키고, 문제가 생기면 소멸시키는 것이 홍준표식 정치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가 경험한 정치적 대립과 충돌은 대개 단선적인 원인으로 파악되기 힘들다. 누구만이 원인의 제공자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친한 친구나 연인이라도 무엇으로든 자주 다툴 수 있고 오늘밤 헤어지더라도 다음날 사과하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서로에게 안전한 관계일 것이다. 어떤 이견도 없고 일방적인 진술만 들린다면 거긴 위계적이면서 억압적인 곳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곳에서 긴장과 다툼이 있다는 얘기가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권위주의 질서가 요구되면서 욕심이나 갈등이 사적 공간에서조차 들키지 말아야 한다면, 거긴 정숙하고 단일하게 보일 뿐 창조적이고 역동적일 수 없는 곳이다. 협회와 감독의 리더십이 요구되고 선수에게도 공적인 규범은 숙지돼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국가대표다움이 일사불란한 품행으로만 강제될 순 없다.
22살 축구 선수가 식당에서 발끈한 사건을 두고 사방에서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범람했다. 차이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린 지배적인 한편의 규범으로 힘을 모으면서 누군가를 파르마코스(희생양)로 정죄하는 정치술에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황선홍 감독이 이강인 선수를 선발하겠다는 기자회견에서 전한 (정치적) 해법이 좋았다. “이런 문제는 늘 있다. 모든 팀원들이 다시 어울리며 운동장에서 풀어가면 된다.” 그렇다. 배제시키지 않고 다시 만나게 하고 조정할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서로 협력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긴장과 갈등은 새롭고도 더욱 강한 힘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태국과 경기할 때 국가대표 축구팀은 긴장한 만큼 활력 또한 넘칠 것 같다. 나부터 어느 때보다도 큰 목소리로 이강인 선수를 포함한 모두를 응원할 것이다. 그들이 함께 달리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새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홍준표 시장은 이강인 선수 일에 관심이 많으니 만나서 식사라도 한번 하면 좋겠다. 순진한 제안이 아니다. 그는 유능하고 경험 많은 정치인이니 나보다도 더 잘 알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화살처럼 날려 보내는 냉담한 말과 달리 마주 보며 나누는 대화가 확신으로 가득 찬 일방적인 주장에 틈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원문 출처: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320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