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11월을 대비하며
1. 오늘 새벽4시에 일어나서 파리 생제르망 경기를 본 보람이 있다. 이강인 선수 폴스 나인 역할 멋지게 수행했고 골과 상관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게 주말 새벽의 유럽 축구는 긴장 가득한 감각을 상기시킨다.
2. 경기가 끝나고 이른 아침에 집 근처 '파리'크라상에 가서 늘 먹는 베이글과 커피를 테이크아웃한다. 이른 아침의 커피는 상념과 상상을 교차시킨다. 갑자기 아스날과의 경기에 이강인 선수가 주전으로 나올지 궁금해진다. 내가 사는 현실과 미디어 서사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무엇이 실체이고 어디까지 임의적으로 구축된 의식인가?
3. 토요일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아침 10시에 아내와 교회에 가서 오후 2시쯤 집에 왔다. 다써둔 '(비판적) 언어감수성'에 관한 원고를 마무리할 수도 있지만.. 그런 무거운 논제를 주말에 쳐다보면 안된다. '내가 안해도 누군가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써둔 원고를 묵혀두는 시간이 길어진다. 내가 안하고 누군가에게 이걸 다 퍼다 주면 좋겠다.
4. 커피를 한잔 더 마시면서 먹먹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읽고 있는 미학과 신학 책을 뒤적인다. 어디선가 배달된 체계기능언어학 책도 보았는데 (엄청 지루함!!) 수북히 쌓인 책더미에 밀쳐두고는 댕댕이, 야옹이를 껴안고 창밖을 다시 바라본다.
5. 늦은 오후에 숲길 산책을 다녀온 아내와 대게를 넣은 라면으로 대충 저녁식사를 하고 댕댕이와 산책도 하고 이제 주말 드라마를 기다린다. 내일 아침도 일찍 교회에 간다. 이른 시간에 예배 봉사를 마치면 하루가 참 길다. 주말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6. 가을학기 시작한지 한달이 지났다. 일(writing)도 좀 해야 할까? 다행히 두달만 버티면 방학의 기운이 넘칠 것이다. 그렇지만 11월은 1년 중에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 종강은 한참 남았고 공휴일은 없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조로 설명하자면 3막이 시작되는 절정의 시간, 복잡한 감정 가득한 고뇌의 계절이다.
7. 아무래도 잔인한 11월을 버티려면 일을 더 미뤄야만 하겠다. 몸과 마음을 더 돌봐야 한다. 여름 충전은 9월에 다 소진되었기에 11월을 버티기 위해 10월 충전이 필요하다.
8. 숲길로, 산만한 독서로, 큐티도 하다가, 미디어 서사도 멍 때리며 보다가, 댕댕이와 야옹이 껴안고 더 쉬어야 한다. 중년이라면 10월 단풍의 경관도 놓치면 안된다. 내리막과 골짜기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찬바람 불기 전에 청계산 매봉이라도 자주 올라가야 한다. 숲길과 달리 집으로 오는 길은 밋밋하다. 그렇지만 그조차로도 영감을 얻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