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공공재가 된다
대화는 아이가 배우는 의사소통 기술만이 아니다. 대화는 초‧중급 수준의 언어학습자가 연마하는 기초적인 언어활동만도 아니다. 대화는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인터뷰 기술과도 다르다. 대화는 공공재로서의 자원으로 봐야 한다. 대화교육은 서로 협력하면서 모두의 변화와 회복을 감당하도록 돕는 사회적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공공재라고 하면 경찰, 도로, 공항, 상수도, 전기 서비스처럼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기반시설을 연상한다. 주차장, 공원, 도서관과 같은 공간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애써 만든 공공재 자원이다. 의무교육인 초등교육도 무상 수준으로 제공되는 공공재이며 공익을 목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다.
대화(교육)는 물리적 인프라는 아니지만 서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인프라로 볼 수 있다. 상호협력적인 대화를 통해 우리는 위로를 나누고, 즐거움을 얻고, 함께 회복되며, 달라진 삶을 감당한다. 그런 점에서 대화교육의 인프라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평생교육이나 시민교육으로 기획되고 투자되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 이용이 증가하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각종 텍스트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공공재로서의 대화교육은 특별한 가치를 갖는다.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을 향한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고 있기에 갈등과 분쟁을 줄일 수 있는 ‘비판적 언어감수성(critical language awareness)’ 교육으로 기획될 수도 있다.
이제 서사로 편집하고, 논증으로 주장하며, 다중모드로 의미를 보완하는 모든 유형의 언어교육은 경쟁을 북돋우는 사유재나 경쟁재가 아니라 모두를 돕는 공공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물론 공공재로서의 언어(교육), 혹은 비판적 언어감수성 교육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무상으로 (혹은 저가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비용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공공재로서의 대화(교육)가 논의되어야 한다.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 혹은 한국어만이라도 의미협상적이고 상호협력적인 대화 속성이 학습될 수 있도록 국가나 지역자치단체가 적정 수준의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지원해야 한다. 사건을 서술하고 논거로 주장하는 ‘어려운’ 대화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대화는 누구나 배우고 사용할 수 있다. 대화교육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전환시킨다. 그런 대화(교육)를 어디서나 언제나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식사를 자꾸 거르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끔찍한 실존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대화답게 나누지 못한다면 언어적 타자로 모멸적이고도 무력한 삶을 감수해야만 한다. 언어적 소외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단한 비법은 없다. 대화만 가르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배고픈 자에게 한 끼 식사라도 무료로 제공하자는 사회적 캠페인처럼 대화다운 대화 역시 학교 안팎에서 자꾸만 확장되어야 한다.
원어민이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현란한 멀티미디어 교재가 동원되지 않아도 된다. 시험점수가 없어도 된다. 구청이나 공립도서관에 공간이 마련되고, 사회적 기업가가 실행을 돕고, 사람 살리는 대화를 가르치겠다는 자원봉사자가 모이면 대화교육은 공공재의 자원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고, 관계를 만들고, 재미를 찾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복원하고,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조성하는 곳에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의미협상적 대화가 있다. 그런 대화는 공공재의 기능을 갖는다. 공공재로서의 대화가 너무 어려우면 안된다. 너무 표준적이고 진지하게만 가르치는 (맥도날드화 원리로 운용되는) 고급 기술이나 시장재로 보여도 안 된다. 유창하고 정확하게 마치 기계처럼 말하는 것이 목표일 수 없다.
공공재가 될 수 있는 느긋하고도 편안한 대화 맥락부터 우리 모두 욕망해야 한다. 어쩌면 내 존재와 서로의 관계를 보듬는 대화를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토요일 아침마다 달리기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여러 국적을 가진,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러너들이 모였다. 잠수교를 지나 한강대교까지 10킬로미터 거리를 한 시간 정도 함께 달렸다. 영어나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참가자도 많았기에 서로의 대화가 유창하게 들리진 않았다. 그렇지만 어울려서 함께 뛰기에는 충분한 질감의 대화였다. 수다스럽진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서로를 넉넉하게 격려하던 대화였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함께 잘 달리도록 돕는 인프라였다. 난 그만한 대화로 달리는 시간이 편하고 좋았다. ‘유창한’ 대화에 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달리기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그런 대화가 오가는 모임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도 좋아한다. 많이 배우지 못한 내 어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늘 같은 화제만 건넨다. 어려운 얘기는 모른다. 대화의 소재는 수십 년 동안 반복된 것이다. 음식 얘기, 시장에서 보고 들은 얘기, 주위 아는 분들이 살아가는 얘기를 내게 전해준다. 나는 그걸 듣고 전과 다를 바 없는 대화를 함께 나눈다. 지루하지 않다. 난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가 참 편하다. 어머니가 좋아서 그런 대화를 편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어머니가 좋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안전하고도 친밀한 느낌이 좋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지금처럼 나와 대화했을 것 같다.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것처럼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양의 대화를 나눈다.
그런 대화를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대화가 누군가에게 너무 어렵기만 하다면 그건 어렵게 가르치고, 어렵게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대화가 어렵다면 그건 개인 탓만 아니다. 혼자서 너무 애쓴 탓일 수 있다. 서로에게 대화가 먼저 편해야 한다. 대화를 공공재의 속성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하고 친밀한 관계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출처 : 대학지성 https://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