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기술은 자기배려의 기술
문제가 되는 제도를 모두 제거하고 극적으로 사회질서를 개조하면 우리는 고통을 도려내고 유토피아적 내면을 가질 수 있을까? 대단하게 보이는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루하게 느꼈던 내 인생이 갑자기 달라질까? 아닐 것이다. 익숙한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매일 선택하고 배치하는 언어와 기호로부터 우리의 존재가 새롭게 의례화되지 않는다면 큰 구조의 변화만으로 내 일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개인의 삶은 거대한 사회질서로부터 포획되겠지만 내가 선택한 텍스트만큼 세상은 그만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온전한 대화 텍스트(를 만드는 나)와 그만한 대화로 살아가는 세상은 변증법적 관계로 봐야 한다. 대화의 관례는 지배적인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대화를 욕망하고 새로운 의례에 참여하다 보면, 화자의 내면이, 익숙한 권력관계가, 우리가 속한 조직의 질서가 달라질 수 있다. 대화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자기배려와 자기변형의 기술이다.
의미를 협상하는 대화기술, 상호작용을 허락하는 대화교육은 우리의 몸과 마음, 관계와 질서를 새로운 현실로 이동시킬 수 있다. 진흙탕에서 우리 모두 지치고 다쳤다고 하자. 진흙탕이니 괜히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진흙탕이 갑자기 맨땅으로 바뀌면 상했던 몸과 마음은 한 번에 회복될까? 소원했던 대화적 관계성이 달라질까?
맨땅에서 싸움은 더 커질 수 있다. 제도와 정책이 바뀐다고 우리가 사용하던 언어가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대화를 가르치고 배우고 사용하는 방식은 끈덕지게 사회적 관행을 따른다. 의지적으로 자기다운 말로 바꾸지 않으면 지배적인 관행에 결박된다. 관행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에 내 언어도 바뀌지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언어를 바꾸며 모두가 익숙한 관행에 틈을 내야 한다.
대화가 합리성의 도구, 시장의 재화, 기술로 관리하는 물질처럼 대상화될 뿐이라면 그런 대화를 하며 사는 인생도 도구, 재화, 물질로만 축소되는 것이다. 대화다운 대화, 나와 너를 연결시키는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가 우리 눈에서 사라지고 귀에서 들리지 않는다는 건 위험한 징후다. 대화교육은 서로 배려하고 각자마다 아름답게 회복하거나 변화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화적 맥락에서 ‘연결’이라는 가치를 간과하면 안된다.
나는 성경에서 연결과 연합의 가치를 가르치는 다음 구절을 참 좋아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에 붙어 포도 열매가 열리듯 대화 맥락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무언가를 해볼 누군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화교육은 언어발달, 인격발달, 자기변형의 처소가 된다. 온전한 대화를 배우지 못했던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존중하고 능동적인 변화를 지향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발달심리학자나 유아교육학자는 유아로 성장할 때 당시 나이에 필요한 욕구와 위로에 꼭 노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습득론 문헌에서 선명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일상적이고 균형적인 대화를 배우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대화의 경험으로부터 화자로서의 실존을 느끼고, 타자를 인정하며, 협력을 배우고, 감정을 나누고, 행동으로 반응하며, 욕망을 지시하고 표현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고립된 자아, 고정된 자아에 갇힐 수밖에 없다.
교재나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대화를 혼자서 공부하는 모습이 참 안타깝다. 자기 혼자서 공감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위로의 주체가 되는 셈인데 그러다가 자기애적 행동장애를 겪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접속하고, 홀로 필요한 걸 찾고, 알아서 빈칸을 채운다.
혼자만의 말하기, 스스로 위로하고 공감하는 과업에만 익숙하다면 어른이 되면서 그와 같은 행위성은 일상의 습관이 되고 자아정체성을 구성한다. 결국 특정 참조물이나 참조물 기반의 의사소통에 중독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나는 다양한 연령대의 교육 현장에서 대화를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거기서 마치 행동장애를 겪는 듯한 (환자와 다름 없는) 대화 학습자를 자주 목격했다. 대화 교재를 마치 효능적인 자아 기능의 일부처럼 붙들고 그걸 계속 외우면서 자기식의 대화법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중독자는 중독된 무엇(예: 술)으로부터 긴장을 풀고, 자신을 위로하고, 그때서야 타인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가져보는, 악행의 리추얼을 반복한다. 혼자서 섀도우 리딩을 하고, 화면을 보면서 공부하고, 청자와 화자를 동시에 연습하는 리추얼은 언어사용에 관한 고립된 (자기만 존재하는) 의미구조를 만들게 한다. 비원어민이라면서, 혹은 초중급 학습자라면서, 어떤 결함에 대해 자꾸만 자책하고 그걸 혼자서 판단하고 메우려는 공부를 반복한다.
맥도날드화된 대화를 가르치고 배우고 그걸 달달 외우고 시험으로 출제하고 준비하는 모습은 마치 냉동음식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인다. 중독자는 중독이 된 상태로부터 자신이 괜찮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결핍된 자아를 감출 수 있다는 보상적 경험을 반복한다. 자신이 붙든 대화로 유능함과 편리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중독 밖 세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감히 맞서지도 못한다.
냉동된 대화에 중독이 된 혼자만의 학습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서적 결속감을 느끼고 싶다면 혼자만 바라보는 영상이나 소리가 아니라 대면으로 만나는 누군가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편안하게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도록 돕지 않았던가? 온전하게 자기배려와 자기변형을 꿈꾼다면 온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 관계가 없다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울 수 있는 자원봉사라도 시작해야 한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