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미래 7

기업부터 학습 패러다임과 맥커뮤니케이션을 재고한다

by 신동일

학교뿐 아니라 기업도 조직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구성원 모두에게 표준화된 학습을 요구한다. 표준적으로 투입되는 입력값 대비 출력값을 계산하면서 인적자원의 역량을 관리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학습’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다.


기업은 학습 패러다임으로 직원의 언어사용과 언어학습에 개입한다. 개인마다 서로 다르게 말하는 방식이 있지만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율이 제시된다. 말투뿐 아니라 말하면서 드러나는 표정, 동작, 감정, 태도까지 교정되며 이를 위한 교육 매뉴얼도 제작된다. 2008년에 영어공용화를 선언했던 LG전자의 사례만 살펴봐도 당시 모든 직원이 표준화된 영어학습과 평가활동에 참여해야만 했고, 통제적인 매뉴얼이 지정한 특정 수준의 영어능력을 요구받았다.


이처럼 학습 패러다임에 의존하게 되면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고 사용하는 방식에 합리성의 원리가 과용된다. 언어는 맥도날드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직 구성원은 모두 비슷하게 말하게 되며 고유하고도 협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의사소통 역량은 오히려 사라진다. 능동성과 다양성의 가치는 소멸하고 다수는 입을 자꾸만 다문다. 불필요한 시험준비, 과도한 언어교정, 서로에게 해악을 끼치는 감정노동이 요구된다. 언어로 회복될 수 있는 정서적 자원이 고갈되면서 많은 직원이 직무 이탈이나 이직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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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의 속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익숙한 자신만의 언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표준화된 언어학습을 통해 직원의 말을 교정하고, 측정하고, 재교육한 것이 조직의 변화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제공할까? 긍정적인 성과를 보고한 사례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요즘 시대엔 전체 구성원에게 표준화된 학습을 획일적으로 부과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학습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성과’ 패러다임을 고려해야만 한다. 성과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도 함축하고 있지만 적절하게 적용하면 학습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조직 구성원에게 학습이 제공될 때 각자의 능력이 개발될 것이며 그로부터 조직은 유익한 결과를 구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논증에는 여러 전제가 숨어 있다. 학습은 긍정적으로 제공될 수 있고, 학습을 마치면 개인의 성장은 낙관적으로 기대되며, 개인과 조직의 역량은 잘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제에 관해 질문을 하긴 쉽지 않다. 우린 어릴 때부터 인풋 대비 아웃풋을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학습’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만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은 표준적인 평가로 점검되고, 학습으로 향상될 수 있으며, 조직과 집단과 국가에 유의미한 성과를 제공할 수 있다. 성과를 만드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학습이다. 학습은 언제나 좋은 것이다. 기업이 투입하는 언어‘학습’ 역시 그와 같은 학습 패러다임으로부터 타당화된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은 직원들에게 표준적인 언어교육을 제공하면서 얼마나 유익한 결과를 얻었던가?


언어학습의 인풋을 직원 다수에게 투입해 주목할 만한 아웃풋을 도출시킨 사례가 학술문헌으로 발표된 적이 있었던가? 또는 기업이 학습시킨 ‘글로벌능력’, ‘의사소통능력’, ‘말하기능력’, ‘대화능력’이란 건 무엇일까? 참 모호한 개념이지만 학습의 책임자나 공급자는 관행대로 맥도날드화된 대화를 가르치고 표준화된 시험으로 관리할 뿐이다. 그게 과연 성과를 도출시킬 수 있는 유의미한 학습이 될 수 있을까?


그에 반해 성과 패러다임은 얼핏 듣기엔 경제적으로 환원이 가능한 물질이나 경쟁의 속성이 강조된 것만 같다. 학습 패러다임은 누구든 학습자라며 배려하는 것 같은데, 성과 패러다임은 업적만 강조하고 직원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꼼꼼히 살펴보면 성과나 학습 패러다임은 모두 기업에 속한 직원의 입장에서 (성과로 직접 보여주든, 능력을 검증받으면서 성과와 연결하든) 별 차이가 없다.


LG전자는 영어공용화를 시작하면서 개인과 조직의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토익이나 SEPT 말하기시험으로 구성원 모두의 언어학습에 개입했다. 학습 패러다임으로 모든 직원에게 요구된 교육내용과 평가방식이 유의미한 조직의 변화를 도출시킬 수 있었다면 LG전자의 영어공용화 정책은 3년 만에 폐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당시에 학습 패러다임이 아니라 성과 패러다임이 적용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일단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되었던 맥도날드화된 영어교육, 표준화된 평가활동, 영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단일언어주의 제도에 일방적으로 힘이 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성과를 도출하는데 더 전념해야만 했다면, 의미협상적 대화든,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든, 트랜스링구얼 정체성이든, 무엇이든 유연하고도 협상적인 방식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업무와 성과가 분명하게 연결되지도 않은 언어학습과 평가활동에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과 패러다임에도 약점이 있다. 성과가 자주 점검되고 관리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이거나 나태한 개인이나 부서가 등장한다. 성과는커녕 무능한 조직문화가 만연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직원이 성과지향적인, 혹은 고객지향적인 행동을 선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과를 만들 때마다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인센티브 제도를 싫어하는 구성원도 있겠지만, 조직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모두를 동등하게만 대우할 수 없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성과 패러다임을 도입하기 힘들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대상화하고 교육과 평가를 통해 학업성취도를 엄밀하게 점검하는 것이 학교에서 해오던 오랜 관행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언어교육)는 좀처럼 변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업이 굳이 교실과 시험장으로 직원을 보내면서 표준과 규범, 인풋과 아웃풋의 학습 패러다임에 결박될 이유는 없다. 기업은 직무기술(job description)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짧은 대화를 들으며 정답을 찾거나 서둘러 1분 남짓 말하도록 요구하는 평가활동부터 폐기해야 한다. 그런 ‘학습’은 직원에게 온전한 학습동기도 제공하지 못하고 조직을 위한 역량에도 유의미한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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