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링구얼의 대화자원
우리는 대화를 어떻게 공부하는가? 대개 신중하게 선별한 인풋을 분석하고 학습하고 암기한다. 그것을 머리에 잘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아웃풋으로 꺼내서 사용하려고 한다. 혼자서, 열심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인풋을 잘 저축해 두면, 과거보다 지금, 지금보다 미래에 더 나은 언어사용자가 될 것이라 상정한다. 초급에서 중급이 되고, 중급에서 상급 수준으로 언어능력이 향상된다.
이러한 발상은 보편적 인간인 학습자 개인이 입력과 출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능력이 발생한다는 인간주의, 언어주의, 분리주의 기반의 언어습득 이론이다. ‘입력-저장-출력’ 모형으로 언어습득을 설명하려면 언어능력은 개인이 보유한 내재적이고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전제되어야 한다. 대화를 하는 과정은 인간의 ‘귀(로 듣고) → 머리(에 저장하고) → 입(으로 전하는)’ 경로를 거친다.
트랜스링구얼(translingual)은 다양한 언어와 기호자원을 유연하게 사용하고 창조한다. 모든 언어는 그저 독립적이거나 고정된 의미체계일 수 없다. 그들은 머리에 저장된 언어 지식만 꺼내어 소통하지 않는다. 눈으로만 바라보고 귀로만 듣고 입만 여는 화자도 아니다. ‘여기와 저기’ 보이는 공간 안팎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활용해서 소통한다.
머리에 저장되지 않은 바깥의 경관, 언어의 형태가 없는 공간의 자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맥락적 지식도 동원된다. 실제적인 의사소통 상황에서 대화를 제대로 못하거나,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면 머리에 저장된 인풋이 부족한 것만이 아니다. 머리 바깥에 있는, 사람 사이에 넘치는 공간적 자원으로 유연하게 대화하지 못한 것이다.
개그맨 김경욱은 스스로 만든 캐릭터 ‘일본인 다나카’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지만 일본인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웃음을 유도할 수 있는 나름의 레퍼토리가 적절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나 일본어 중 하나만을 엄중하게 선택했다면, 한국어를 어리숙하게 하면서 가끔씩 일본어를 구사하는 정체성 자원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학습자나 수험자의 정체성에 결박되었다면 일본인은 아닌데 일본인처럼 보이는 공간적 자원이 활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어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쉽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대화를 나눌 만한 어휘나 문법 지식이 충분히 머리에 축적되지 않은 탓일까? 그렇지 않다. 언어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공간적 자원까지 잘 활용된다면 일상적인 대화는 어렵지 않다. 대면 대화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다. 대단한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 혼자 애를 쓰고, 상대방 얼굴만 쳐다보며, 머리에 든 것을 꺼내고, 입을 열어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하는 것이 대화라고 생각한다면 대화는 수백 명 청중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만큼 어려워진다. 맥커뮤니케이션 화자는 머리에 외워 둔 것을, 혼자서, 화면이나 지면의 글자만 집중하면서, 후다닥 입을 열어 말해야 한다. 그런 대화라면 누구도 편하게 말할 수 없다.
자신에게 익숙한 어디선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대화한다면, 그 공간의 보이고 들리는 모든 레퍼토리는 의미를 교환하고 수정할 때 유용한 자원이 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빨간색 옷을 입고, 빨간색 기타를 둘러메고 있다면, 빨간색 사물은 대화를 시작하고 화제를 전환할 수 있는 좋은 밑천이 된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지만, 한국인 선수들이 영국이나 프랑스 프로축구 리그에서 활약한다. 국내 프로 스포츠 구단에도 해외에서 유입된 외국인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감독, 스태프, 관중, 동료 선수와 어떻게 소통할까? 영양사에게 식단에 대해 문의하고, 트레이너와 몸을 관리하고, 팀 닥터에게 고통을 호소하거나, 동료들과 작전을 의논하는 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목표언어의 문법지식에 능숙하다면 대화를 잘 감당할 수 있는 레퍼토리 하나를 확보한 것이지만 그것이 부족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익숙한 축구장 안팎의 비언어적이고 공간적인 자원이 있다.
중국계 태국인 4세이며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텐은 어떻게 한국의 다국적 아이돌 그룹 NCT, SuperM, 중화권 기반 의 다국적 그룹 WayV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그는 열여섯 살에 한국에 와서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한국에 있는 기획사가 중화권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 때 선발된 태국인이다. 여러 멤버와 표준 중국어로 소통하지만, 필요에 따라 영어, 한국어, 태국어도 사용한다. 모국어가 중국어인 멤버 쿤과 대화할 때는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고, 대만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어릴 때 독일 국제학교에서 성장한 양양과는 영어로 소통한다. 그들이 찍은 유튜브 영상을 보면 하나의 언어만이 지배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나온다. 멤버들이 모든 언어에 능숙한 건 아니기 때문에 트랜스링구얼만의 전략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어마을이나 LG전자의 영어 공용화 현장에서도 ‘영어만’ 사용하는 모노링구얼이 아니라 어떠한 언어와 기호든 전략적으로 동원하는 의사소통 방식이 수용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규범의 언어학, 전통적인 언어학습법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원어민 기준, 인간의 인지 장치, 표준적인 언어형태만을 강제하지 않고 물질과 비물질, 언어와 비언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보완적인 상호작용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걸 조금 복잡하게 설명하려면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편평한 존재론flat ontology’, 혹은 ‘객체 지향성object-oriented ontology’ 논점을 참고할 수 있다. 편평한 존재론은 인간과 언어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동등하고도 연결된 존재자 혹은 객체로 본다.
인간(중에서도 원어민, 백인, 미국인)이나 언어(중에서도 표준적이고 권력적인 영어)에만 차별적이거나 특권적인 위치성을 주지 말고,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고 사용하는 의사소통 활동에 모든 공간적 (비인간 객체들의) 자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대화교육은 모더니티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언어적이고 공간적인 대화자원에 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면, 인간의 보편적 언어, 언어의 표준적인 형태에 관한 강박(맥도날드화) 또한 사라질 수 있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