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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진영 논리, 새로운 언어-교육

by 신동일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1. 나는 10여년전에 페이스북에 시작하면서 지금도 가끔 글을 올린다. 페북 프렌드들의 나이, 직업, 성향이 참으로 다양하다. 사실 대부분 잘 모르는 분들이고 페북 활동에 크게 개의치 않기도 해서 학자든, 정치인이든, 목사님이든, 근본주의적 세계관을 (내가 보기에) 거칠게 드러내는 분들은 늘 부담스럽고 그래서 그런 분들은 페북 프렌드 리스트에서 정기적으로 지운다.


2. 나는 기독세계관, 자유주의, 실용주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편이지만 편향적인 혹은 근본주의적인 세계관에 집착하면서 세상을 향해 거칠게 계몽적이고 폭력적인 글을 쓰는 분들을 늘 경계한다. 나는 직업이 교수이고 늘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진실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진실의 효과를 언어가 배치된 관행으로부터 연구하면서 섣불리 '이것만이 선이고 진리'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유목민 혹은 경계인의 위치에서 개량적이고 중도적 연구활동을 하는 편이다. 요즘 시대 풍조에 나 같은 사람은 정치적, 종교적 편향성으로 무장된 극단의 좌-우 진영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씹기 좋은 오징어로 보일 것이다.


3. 요즘은 주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문헌을 많이 참조하는 편인데 한동안 내 학문 분야에서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논점을 자주 인용했고, 좌파와 우파를 넘자는 절충주의자로 비판받은 영국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후기모더니티 모형을 참고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이론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센 목소리를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안주감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앞으로 그런 오징어의 인생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4. 이분법적 진영의 진리관은 대한민국의 문화윤리학 맞다. 어디든 목소리 내려면 그런 한 편에 줄서는게 좋다. 한국의 근대사를 보면 그렇게 줄을 선 지식인(?)이 선명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변증법적 진보의 역사가 만들었다. 사실 어디서든 그렇지만 여기도 지식인이랍시고 양비론적 태도를 갖는 것에 못마땅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5. 그렇지만 말이다. 난 그렇게 못하겠다. 극단적이고 단정적인 논점을 보다가 양쪽을 오가는 개량적 글쓰기를 보면 물론 싱겁다. 지식인을 자처한다면 근대성의 폭력성이 먼저 고발해야 했기에 비관과 낙관을 오가는, 인간주체와 사회구조를 직조하는, 미시와 거시를 묶고, 이론과 생활을 함께 바라보는 논술은 아무래도 심심한 느낌을 준다.


6. 그러나 내 삶을 성찰해 보면 난 젊은 나이에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고, 일찍 결혼을 하고 가족으로부터 놀라운 위로와 영감을 나누었고 크리스쳔의 삶을 살았다. 교수로, 연구자로, 살아가고 일하면서, 언어를 배우고, 분석하고, 사용하고, 의심하며, 그리고 그걸 통해 세상을 돕자고 작정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가 어느 한편,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가정 안이든 밖이든, 보이는 일상의 의례든 보이지 않는 사회적 모순이든, 한편만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넋놓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논조만도 동조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흥미롭게 바라보지만 그걸로 낙관적 세계를 꿈꿀 수도 없다.


6.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상대편 골대만 있고 이쪽 골대는 없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내가 보기엔 로마 시대에서 역사책은 끝났다. 그런데 자꾸 한쪽에서 골목대장하면서 나머지 다 틀렸다고 하면, 아니면 한번 틀린 건 계속 틀렸다면 하면 그건 내가 보기엔 지식의 우상을 섬기는 자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문제해결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내가 공부한 바로는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과 살아가는 삶은 끊임없이 유기체적으로 직조되며 움직인다. 내 지식관으로는 한쪽 편에서만 어르릉대면서 대화적이고 변증법적인 지식관을 결코 폐기할 수가 없다. 우리는 고작 몇 십년 책을 보다 살다 죽으니 자신에게 권력과 진리가 된 지식에 발 빼기가 어려울 뿐이다.


7. 지금 사회는 우릴 자꾸만 한편으로 폐쇄시킨다. 종교단체, 학회, 학교, 정당, 동문회, 심지어 사적인 관계까지도 우린 얼마나 개방적이고 대화적이고 유연하게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신념과 가치를 말하고, 조정하고, 타협하고, 횡단적으로 혼합시킬 수 있을까? 언어는 이제 상징적 기호로 각자 서 있는 바깥에서는 알수 없는 암호나 낙서 수준으로 보이진 않을까?


8. 말과 글이 집단의 획일적인 규범과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무기로 변질되고 그곳에서 통용되는 기호화된 언어로만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언어를 통해 차이와 다양성, 협상과 조정, 유희와 횡단의 가치를 다루기 힘들어진다. 언어는 딱딱한 연장이 되어 집단의 연대를 돕는 명사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 집단의 교리는 우상이 될 것이며 거기 바깥의 언어는 반입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결코 좋은 언어사회로 보이지 않는다.


9. 진영에 묶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어교육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언어로부터 진지한 선언과 신념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낄낄대며 서로 웃고 웃기는 언어, 동등하고 즉흥적인 구어문법의 대화, 크고 작은 내 히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고 모두 경청하는 스토리 교육, 비판적이지만 실용적인,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협상적이면서도 진보를 이끌 수 있는 토론과 논쟁 교육도 필요하다.


10. 다만 어디에서, 그리고 누가, 공존을 가르치는 언어교육, 변화를 위한 언어교육, 다른 사람들을 어째거나 묶어줄 수 있는 언어교육을 기획할 수 있을까? 어디도 누구도 그런 언어-교육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언어, 전쟁의 진영은 서로를 계속적으로 저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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