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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May 27. 2021

freedom, love, languages 19

미니멀리스트로 산다는 것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1. 격리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고 다시 이사를 할지도 모르고... 미니멀리스트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소유한 물건을 처분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이 비우고 버렸지만 여전히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건 필요나 과시의 물건도 아니고.. 그저 성공의 기억, 행복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욕망의 재현일 뿐입니다.     


2. 예를 들면 'Matrix', 'ER', 'Family Man', 'Dead Poet Society', 'Mr. Holland's Opus', 'Parent Trap', 'Back to the Future' 20대 학생 때 사둔 비디오 테입이나 DVD를 아직 모셔두고 있습니다. 대체 이런 심리는 뭘까 생각해보았는데요... 아마도 사랑스런 남편, 좋은 아빠, 멋진 선생님, 영웅적인 서사를 가진 학자, 연애든 일이든 쿨~하고 의연하고 그러면서 섹시한 전문가가 되겠다는 욕망을 (젊을 때 보았던) 영화의 장면에 이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기억과 욕망이 꼭 문제라는 건 아닙니다. 그걸 지나치게 집착하니 문제인거죠. 근사한 슬로건이든 이미지든 집착이 큰 만큼 새롭게 변화할 공간을 찾거나, 횡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아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인생이란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질병과 노년이 가시권으로 들어오는 남은 삶이 화려하지만도 않겠죠. 그래서 과거의 기억과 기대에서 의연하지 못하다면 오늘의 일상을 정면으로 쳐다보기 힘들며 불행이나 아픔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겠죠.     


4. 예전에 그토록 좋다고 보고, 듣고, 읽고, 모으고, 집착하면서 지금 저의 독립적인 자아가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사실 그게 그리 견고한 것도 아닙니다. 자아라는 것이 필연적이거나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역동적이지만 늘 모순적인 것이고 관계와 맥락에 의존하며 이율배반적이고 편집적입니다. 특히 권위적인 위치성을 가진 교수는 평생 교수로 살 것처럼 일상을 과시하며 살곤 하는데 "평생 교수로 살 것처럼 살면 실패한다. 조기에 은퇴할거란 마음으로 살거라"라고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선배학자가 해주신 말을 떠올립니다. 결국 다른 누군가가 되죠. 당료나 고혈압 같은 병이 생겨 약을 먹고 신체의 고통을 겪기만 해도 나였던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과거의 나로 못 삽니다.   

   

5. 약간 망설였습니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아몬드를 깨작깨작 먹으면서 창 밖을 보다가 그냥 다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DVD 뿐만 아닙니다. 해외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산 셔츠, 옛날 일기장이나 수첩, 아껴 사용했던 중고 전자제품까지 버렸습니다. 기억으로 쥐고 있다면 세월이 많이 흘러 문득 창고에서, 혹은 서랍장에서 보물처럼 발견하곤, 자녀나 학생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감상적으로, 혹은 으시대며 말할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도 몰라주면 혼자 와인 한잔 마시며 상념에 빠질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제 기억과 일상의 공간에 이런 것까지 보관할 여유가 이젠 더 없습니다. 용량 초과의 표지는 제 삶의 여러 단면에서 이미 드러났고요 그런게 마치 문지기와도 같아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미래의 생명력마저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 배가 진짜 고프면 정말 먹고 싶은게 생각납니다. 눈 앞에 소유가 줄면 정말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만이 눈에 들어올거라 봅니다. 제 인생에서 그게 뭔지 아직도 너무 궁금합니다. 인생이 더 담백하고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핑계삼아 고독의 시간을 감수하고, 제 자신을 더욱 정직하게 보고 싶습니다.     


7. 소유보다는 존재, 소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면서 살기를 진심 소망하고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영혼으로, 학술 분야에서 몇가지 연구활동으로 세상에 기여하면서, 저를 꼭 필요로 하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몇몇 분들과 깊게 교제하며 살고 싶습니다. 소모성 사교관계는 더 줄이고, 밥상은 소박하게, 옷도 검소하게.      


8. (논)픽션 책들, 이런 저런 음악 CD나 DVD 영화 등을 주위 분들에게 드리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후련합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렇게 소유한 물건들과 이별한다고 하네요. 저는 자발적 가난, 귀촌, 무소유, 생태적 일상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음식, 신체, 리츄얼, 공간, 자유에 대해 자주 묵상해봅니다. 어쩌면 소유든, 관계든, 성취든, 삶의 지향점이든 좀 더 미니멀리스트적인 삶으로 선회할 것 같습니다. 회피가 아닙니다. 용기 있게 직면하기 위함입니다.    


9. 경북대 김두식선생님이 책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나이 들어 자녀 결혼시킬 때 식장이나 하객 규모에 신경이 쓰인다면 그 곳이 어딘지, 몇 명이 앉아 있든 위축된, 아니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그런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사회규범과 예의는 갖추며 살겠습니다. 가진 것, 그저 얻은 것 모두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소유한 것으로부터 체면과 강박증의 인생을 살진 않겠습니다.    

10.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도 자유입니다. 반지성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배짱도 자유함에서 나옵니다. 신자유주의/단일언어주의의 거대한 시대 풍조를 비평하는 연구활동도 개인 연구자로서 자유하지 않고는 불편한 감정을 결코 못 버립니다. 언제든 할 만큼 하고 중단하고/중단될 수 있다고 믿는 마음도 자유함에서 옵니다. 가진 것과 가질 것에 집착하고서는 자유는 없습니다. 삶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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