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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May 28. 2021

freedom, love, languages 20

평범한 일상도 선물이다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1. 일중독에 관한 책을 하나 더 읽었다. 중독은 강박적으로 사고하게 하며 자율성과 통제력을 잃게 한다. 내게 필요한 건 더 일하는게 아니라 용기를 내는 것이다. 성취와 타인의 시선만으로도 나를 존재시키고 싶지 않다. 저녁과 주말에 그래서 일을 하지 않는다. 사실 주중에도 자주 일하지 않는다. 참 잘한 결정이다. 중독보다 낫다.

  

2. 주말에 느긋하게 재즈를 들으며 라자냐를 먹자 했는데 그냥 처음 들어보는 첼로 연주를 들으며 토마토를 구워 먹었다. 블랙 올리브, 바실, 후추 등을 대충 넣고 굽다가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먹으니 주말 요리답다. 아쉬운 건 볼륨을 높여도 소리가 잘 안들리는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은 좋은 스피커를 사나 보다.     


3. 주중 수업을 마치지 마자 너무 지쳐서 주말에 내내 쉬자고 결심하고 그나마 나가는 정기 모임도 다 빠졌는데 장례식에 갑자기 가야 했다. 그곳에서 얘기를 늦게까지 나눴고 어제는 친지와 식사할 일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느낌... 다행히 '밀레' 특별전에 가서 넋놓고 그림을 멍하게 보다 나오니 기운이 생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정말 밀레의 영향을 받은건가? 그림을 두점 샀다.  

   

4. 봄날의 올림픽공원을 걸었는데 참 좋았다. 이 근처에 회의하러, 또 이런저런 진지한 업무 때문에 합숙하러 자주 왔었는데 이곳의 봄날이 이렇게 좋은지 정말 몰랐다.     


5. 주초에 학교에서 회의를 했는데 자꾸만 지루해진다. 창조적으로 바꾸든, 새롭게 의미 부여를 하든, 뭘 해야만 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럼 하던 일도 그만 두어야 하나? 아직 뭘 억지로 할 때가 아니지 않나?     


6. 몇차례 기업이나 언론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문을 하거나 인터뷰를 했다. 컬럼을 다시 쓸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예전처럼 그런 일에 큰 기대가 생기지도 않고 열정도 예전만 못하다. 의도는 선별적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영향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제도든 사람이든 난 예전만큼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뭐든 쉽사리 바뀌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일게다. 난 염세적이 되고 있는건가?     


7. 아니다. 난 한번도 비관적이지 않았다. 삶은 선물이었고 멋진 여행길이었다. 성취에 상관없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다만 해가 갈수록 세상과 현실의 장벽에 더욱 명민해진다. 내가 할 수 있고 꼭 해보고 싶은 것에만 민감하고 싶다. 여전히 이상을 품고 내 연구분야에서 책임감도 갖고 있다. 미숙하게 서두르거나 턱없는 영향력을 꿈꾸지도 않는다. 


8. 학자는 도박꾼이 아니다. 한 자리를 지키며 심심하게 매일 꾹꾹 눌러 읽고 쓰는 사람이다. 어느 때보다 학생들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포기하자 말자고 손도 내 민다. 어느 누구보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다.     


9. 지난 한 주동안 특별히 기억에 남는 리츄얼이라곤 목요일 밤에 테니스를 친 것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의식적으로 몇가지 더 좋아하는 일로 리츄얼을 만들자 싶다. 아니면 하던 리츄얼이라도 스토리로 풀어야 한다.    

 

10. 봄날의 향기가 만연한데 화려한 봄날 하나 이렇게 쓱하니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나마 참 다행인건 폴 세잔이 말한 "향기를 볼 수 있는" 사색의 일상을 선물 받은 것. 무위의 피로감이 아주 천천히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 내면의 깊은 욕망과 두려움이 이 봄날에 다 흩어나온다. 그게 흥미롭고 감사하다. 주말 잘 보냈다. 고구마도 다 삶았고 빨래 널고 이제 잘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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