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글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신간을 준비하면서 제가 써둔 시작글입니다. 며칠 후 출간을 앞두고 공유합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1154772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언어와 기호로 살아갑니다. 대개 상식과 관행으로 뒤덮인 구조화된 의미체계 때문에 위축되고 고통받습니다. 그런 중에 누군가는 새로운 의미체계로 기득권력에 도전하거나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주장합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고 있는 의미체계가 언어/기호로부터 구성된 것’이라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감정, 욕망, 정체성, 관례, 권력관계, 사회질서는 모두 언어/기호의 구성물입니다. 그걸 제대로 학습하기만 해도 우리 삶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의미와 기호’의 구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의 의미덩어리들에 포획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미학적이면서도 고유한, 한편으로는 저항적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내가 가르치는 어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뿐 아닙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세상이 쏟아내는 언어/기호, 혹은 세상을 구성하는 언어/기호의 의미작용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나 언어/기호를 통해 사랑을 나눕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능동적으로 소유하면서 그만한 언어/기호를 서로 자유롭게 교환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을 둘러싼 사랑에 관한 세상의 의미체계에 포위되어 자신이 할 만한 사랑을 마치 심부름꾼처럼 수행하는 것일까요? 사랑하지 않는,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사랑한다고 끼워맞추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심리학자라면 연인들의 심리로,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라면 사회적 의례나 규범으로 사랑하고 소유하고 미워하는 감정과 관계성을 파악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연인이 주고받은 언어/기호를 먼저 주목합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것도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익숙한 언어/기호의 선택과 배치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연인을 둘러싼 심리 상태도, 문화적 관례도, 사회적 권력구조도 모두 언어/기호의 선택과 배치로부터 탐색되고 확증될 수 있습니다.
나는 스토리텔링, 서사, 담화, 담론, 대화, 의미와 기호, 혹은 언어능력, 언어사용, 언어평가, 언어사회, 언어정책, 언어정체성, 언어통치성 등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합니다.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영어와 한국어로 논증 기반의 연구논문 작업을 합니다. 그와 함께 언어감수성을키울 수 있는 인문교양서 집필은 내가 학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중요한책무였습니다. 위험한 권력, 나쁜 사회질서는 존귀한 우리 각자의 삶을 왜곡하고 위축시킵니다.
국가와 시장, 기술과 과학, 부와 권력이 늘 옳을 수 없습니다. 질문하고 대항하고 대안을 찾으려면 세상을 구성한 언어/기호에 관한 비판적 감수성을 작정하고 학습해야 합니다. 이 책은 세상 사람들이 그걸 조금이나마 알게끔 돕는 책입니다. 언어/기호로 구성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또는 고통과 고립 중에 자신만의 미학적 삶을 포기하지 않을 분들께 이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2022년에 발간한 《담론의 이해: 담화, 담론적 전환, 비판적 담론연구》에서 나는 진솔하게 삶을 고백하며 담화/담론의 속성을 다양한 위치에서 조망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직접 경험한 서사와 학술문헌을 통해 정리한 논증 등을 유기적으로 직조하진 못했습니다. 언어/기호와 연결된 정체성과 통치성의 논점도 더 다루고 싶었지만 논점이 너무 복잡해져서 우리 일상에 펼쳐진 언어경관만 분석했습니다. 방송, 광고, 영화, 기타 문학예술 작품 등에서 예시를 많이 발굴했습니다.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의 예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어와 영어 자료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언어’와 ‘기호’란 용어를 어떻게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할지도 고민했는데 편의상 둘을 ‘/ ’ 표시로 묶어서 사용했습니다. 소쉬르는 기호 안에 언어를 포용했지만 바르트는 언어학의 원리를 높게 평가하면서 언어 안에 기호를포용했습니다. 언어를 기호의 상위 범주로 두었지요. 그러나 언어도 기호이지만 인간의 언어보다 기호자원이 더욱 다양하고도 역동적입니다. 언어사회를 연구하는 내가 ‘언어’라는 용어와 거리를 두기도 불편했고 그렇다고 ‘기호’에만 집중하는 것도 망설여졌습니다. 이 책에서는 기호의 의미체계에 더 집중하긴 했지만 ‘언어/기호’라는 용어를 그런 이유로 묶어서 사용했습니다. 언어뿐 아니라 코드화된 규칙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각기호를 예시로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언어학, 기호학의학술전통에서 다양한 논점을 정리했기에 이 책을 통해 시각영상 자료의 의미체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담긴 여러 논점과 예시를 함께 찾으며 즐겁게 공부한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그들과 질문을 주고받고 토론하며 많이 배웠습니다. 학교를 이미 떠난 그들이 궁금하고 보고 싶습니다. 결혼은 했을까요? 팬데믹 시기는 어떻게 또 이겨냈을까요?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가 늘 녹록지 않겠지요. 그래도 내 수업에서 배운 것처럼 언어/기호를 새롭게 선택하고 배치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하고도 멋진 삶을 결코 포기하지 말기를 … . 그렇게 멀리서 그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