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침과 절제에 관해서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1. 나는 소유보다는 존재, 소비보다는 경험,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소비하고 과시하며 사는 인생을 선망하기도 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지금 미니멀리스트의 삶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일하며 내 도움이 꼭 필요로 하는 분을 친밀한 관계에서 도우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분들과 기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밖에는 불필요한 지출이나 소모적인 사교 모임도 없습니다. 입는 옷도 검소합니다. 그렇지만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담백하고도 평안합니다.
2. 나는 자발적 가난, 귀촌, 무소유를 언급할 만한 미니멀리스트가 아닙니다. 타인의 눈치를 보고 비루한 자의식으로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미니멀리스트는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포획하는 현실을 당당하게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버릴 건 다시 버리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붙들고 살 수 있거든요.
3. 평생 열심히 살고도 자녀가 결혼할 때 식장의 화려함이나 하객 규모에 신경이 쓰인다면, 수백 명이 객석에 앉아 있든 말든 너무나 비천하고 위험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변호사나 교수보다 ‘작가’로 불릴 때가 더 좋다던 김두식 선생님의 <<욕망해도 괜찮아>> 책에서 본 논점인데 참 공감되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 새출발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 그것만으로 감사와 기쁨이 충분하지 않다면, 타인의 시선에게 본인이 지켜야 하는 삶의 존귀함을 도둑맞은 것이나 다름없죠.
4. 남의 눈치를 보며 우리는 학교나 직장에서 늘 들떠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있어요. 왠지 더 능동적으로 뭘 준비해야 할 것만 같고 그래서 들뜬 상태로 뭔가를 당장 시작하기도 합니다. 미디어는 그래야만 리더도 되고 성공한다고 가르치죠.
5. 그렇지만 우리는 요란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붙들고 생명의 에너지를 온전히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일상의 리츄얼, 음식, 옷, 몸, 관계, 공간, 문화양식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먹고 마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미디어에서는 마치 경쟁하듯이 넘치도록 먹고 마시는 모습이 나오지만 먹는 쾌락이 지나치면 기쁨은 오히려 사라집니다. 맛있다고 과식을 하면 정말 맛있게 먹은 순간마저 왜곡하게 되죠.
6. 뭐든 넘치면 몸도 마음도 균형이 깨지더라고요. 차라리 먹든, 놀든, 일하든, 들뜬 상태에서 발산하는 쾌락은 절제되는 편이 좋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생명의 에너지는 미온수처럼 한결같이 유지될 때 힘이 더 붙었습니다. 하는 일이 잘될 때가 있죠. 그때는 밤이 늦도록 식사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쉽더라도 내일을 위해 (그리고 꾸준히 계속 일하려면) 열심히 일하고 한 후에 딱 멈추는 편이 더 좋았습니다.
7.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산책을 매일 합니다. 현재성에 충실하려는 나만의 리츄얼이죠. 그럴 때 느끼는 과잉이 사라진 담백한 평정심, 그게 참 좋다는 걸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게 참 편안하고 좋습니다. 밤에는 잠을 자야죠.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넘치는 쾌락은 없지만 생명을 느끼기 충분한 평화입니다. 팬데믹의 파도를 타면서 나는 차분하고도 야무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탐나는 무언가를 빠르고도 능숙하게 소유하지 못해도, 성공의 욕망을 보란 듯이 채우지 못해도, ‘지금 여기서 나는 아주 딴딴하고도 기쁘다'라는 존재성을 느낍니다.
8.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분주하게 지내면서, 또 학술연구를 주로 하면서, 다른 글쓰기를 시도하는 건 늘 쉽지 않았습니다. 초고를 만들면서 몇 년이 훌쩍 지납니다. 그런 중에 눈높이가 달라져서 써둔 것이 성에 차지 않고 초고를 다시 쓰곤 합니다. 예전엔 그런 과정이 마치 지루한 노동처럼 느껴졌습니다.
9. 그런데 미니멀리스트의 여정 중에는 그런 일이 지루할 수 없죠. 다 버리고 귀하게 남겨둔 미니멀 일상의 중요한 의례이니 오히려 기쁘고도 담담하게 하는 편입니다. 책을 내고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니까요. 길가에 핀 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내게 허락된 생명의 에너지를 글로 전하자는 마음이니까요. 잘 되면 감사할 일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고 위축된 삶을 자초할 이유가 없죠. 내가 채우지 못한 건 다른 누군가 채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10. 오염된 삶의 현장에서 영적 감수성을 높이자는 켄 가이어작가의 책 《묵상하는 삶》에 내가 좋아하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열심을 다해 섬김에 힘쓰지만 분주해 보이던 마르다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해석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마르다의 준비가 아니라 산만해진 마음이었다. 많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많은 일이 한 가지 꼭 필요한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르다에게는 일의 원천이 되는 고요한 중심이 없었다. 마음의 골방이 없었다. 회전하는 활동의 고정축이 없었다.”
11. 나도 한때는 분주함이 자랑이었고 불평이 은신의 기술이었죠. 이젠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고요한 중심을 지키면서 담담하면서도 대담하게 문제적 현실과 직면할 것입니다. 뜻밖의 위기를 다시 만나면 이렇게 구축해둔 평화가 깨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난 알아챘어요. 다른 누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조차 결코 나를 온전히 변화시킬 수 없으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전쟁은 평화와 사랑의 영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매일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난 그런 기도를 자주 합니다. 어둠과 싸우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또 그만한 나만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지 말 것. 상황을 부정하고 잊거나 벗어나려고만 애쓰지 말 것. 빛을 가져올 수 있기를, 아니 빛이 내게 비춰지기를.
12. 자유는 밖에서 제도와 정책으로만 만들어지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서도 매일 떠오르고 다시 구성되는 관념이기도 하죠. 바깥만큼 내면도 격전장입니다. 미니멀리스트는 거기서 미학적으로 실존하기 위한, 우리가 전략적으로 스스로 구성하는 자아정체성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