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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Sep 05. 2019

드라마, 전원일기 그리고 정

아날로그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 재현되는 드라마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2012년에 방영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다.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지속적으로 봐야 하는 부담감과 아이들을 위한 환경 조성이라는 목적, 그리고 막장 드라마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아이들 아빠가 싫어하는 이유도 한몫 거들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바람직하며 또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하기에 별 불만 없이 같이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저녁이면 건전한 시청 시간을 즐기자고 마음 먹던 차였다. 런 덕분에 참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정책 방송에서 재방영하는 오래전 드라마 중 하나인 전원일기를 보다가 그대로 꽂히게 되었다. 장장 22년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란 것 외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다른 얼굴로 내게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야말로 푹 빠졌다, 또 다른 재방영 드라마도 있건만 오직 전원일기에만 빠져 그 시간을 체크하고 기다렸다.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의 재발견에서 오는 새로움과 출연진들의 비포 애프터의 모습도 재미있지만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건  그 시대 문화와 사람들의 정서 부분이었다. 바로 엊그제라고 생각한 삼십여 년 전이 현시점에서 비교해보니 엄청 달랐던 것이다. 진한 향수를 몰고 오는 영화 '써니' 나 '응답하라 1994' 와도 좀 다른 느낌이었다. 시나브로 흘러왔기에 수평적 연장선상에서 그다지 큰 변화를 못 느꼈으리라.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있었다.

아날로그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 재현되는 전원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제 와서 보니 초반 드라마의 기술적인 부분은 유치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음향 효과가 오버되어 산만한가 하면 아버지 최불암한테 농촌 생활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는 유인촌의 연기와 대사는 딱 무대 위의 연극 제스처였다. 산림 공무원인 큰아들 김 용건의 책임감도 뭔가 딱딱한 겉껍질에 둘러싸인 듯 융통성 없는 옛사람들의 고지식한 사고방식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회수가 거듭될수록 그런 어색함은 없어고 자연스러워졌다. 글의 초점은 그 시절의 순수함에 맞췄기에 비평은 금하련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도 개인보다는 공동체로써의 가족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시나브로 변해 온 것인데 그런 부분들이 지금의 시각으론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건, 그때는 나이 든 연기자가 없었나. 일용 엄니 김수미가 삼십 대 초반이었다는데  농촌 할머니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선지 분장만 할머니일 뿐 움직임이 너무나 재빠르고 민첩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요즘 같으면 옥에 티로 지적당하고도 남을 만하겠지만.... 내게는 힐링의 드라마로 마치 한 권의 순박한 동화를 읽는 듯 마음이 충만하고 따스해지는 걸 느낀다.

무엇보다 그 시기 사람들 사이의 정 문화가 돋보인다.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오직 우리 한국인들에게만 있다는 정, 그 정이란 정서가 전원일기에서 철철 넘치는데 어느새 달라진 작금의 문화와 절로 비교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저랬었어, 그때는 저렇게 살았던 거 같아' 그 자연스러웠던 삶의 모습들이 이토록 변화했다는 것을 드라마를 보면서 재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서로 간 모두 친인척이다. 서로 부르는 호칭만 해도 다 가족 사이의 호칭이다. 아줌마, 아저씨, 이모, 언니 오빠 등을 보면 그렇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친근하고 가까운 건 말할 것도 없을 테다.

한 마을이 너 나 없이 한가족처럼 드나들고 나누며 사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건만 지금 왜 내게 그것이 그토록 감동으로 다가오는 걸까. 그만큼 삭막해졌다는 말일 테다.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범죄가 되는 세상에 그처럼 되돌아가서 살라 하면 절대 노노를 외치며 뒷걸음칠 게 분명하면서도 마음은 그립고 그리워서 어쩔 줄 모른다. 맹목적 서열로 주눅 들고 수긍해야 하고 입 바른말 한마디조차 변명이 되고 무례함이 되는 장유유서의 비합리적 관념을 예절이란 이름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면에서는 그 모든 생활양식이 낡은 문화적 관습의 나부랭이라며 혀를 차는 것 또한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예전 나 어렸을 적도 옆집 아주머니가 시시 때때 불현듯 우리 집 문턱을 넘어서곤 했다. 식사 중이든 말든 어느 순간이고 여하 간에 당신 집처럼 드나들었어도 예의를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일상의 관계였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처럼 나도 친구 집 대문을 드나들었고 누구나 다 그랬다. 엄마 아버지가 부부싸움을 하거나 부자 간 갈등으로 시끄러우면 남의 집 일이 아니라 내 집일인 양 누구라도 들어서서 말리고 훈수 두기도 했다. 일용 엄니가 김 회장 집을 내 집 드나들듯 드나드는 것, 일용이가 엄마한테 버릇없이 화낸 것에 대해 아버지처럼 혼내는 김 회장의 모습엔 왠지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풍경들일 테지만 그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이며 향기가 아닐는지. 그래서 이토록 그 삶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는지.

적어도 타인과 차단된 채 외면되거나 방임되거나 그리하여 고독사에 이르도록 서로 무심하지 않았던, 처얼철 넘치는 정으로 배고프지 않았던 그 시절의 평범한 사람살이가 왜 귀중한 골동품처럼 감상이 되는 것인지. 초속으로 변화하며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미래라는 시간 앞에서 주눅 들고 무기력해진 채 그 별 것 아닌 별것들에 감동되어 흐뭇한 눈으로 티브이 앞에 동그랗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인가 보다.
''ㅋㅋ 엄마! 할머니 같아, 저런 게 재밌어? ''
화면도 좋지 않은 옛날 농촌 드라마에 빠진 이유를 아이들이 감히 알 수나 있을까.


#전원일기 #재방영드라마 #수필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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