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잘 산다.
1. 모든 행동에는 원인과 목적이 존재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피곤하면 잠을 자고 아프면 병원을 간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심심하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원인과 목적이 부재한 행동은 존재할 수 없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개로 분류, 이들의 계층을 순위 매겼다.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하위의 욕구로, 존경받고 싶거나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욕구를 상위의 욕구로, 하위의 욕구가 충족되어감에 따라 상위의 욕구를 갈망한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행동한다. 더워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아파서 병원을 가는 건 불만족스러운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다. 노동의 목적은 생존을 위한 자본의 획득이며 헬스장에 가는 건 이상적인 신체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함일 수도, 어제보다 더 높은 중량을 들어 올렸다는 향상심의 충족일 수 있다.
오늘의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 나아질 내일을 기대하며 나는 행동한다.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 행동들이 모여 내 삶의 총체를 이루고 방향을 설정하며 삶을 이룬다. 오늘의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 나아질 내일을 기대하며 나는 살아간다.
2. 무엇인가를 잘 한다. 일을 잘한다, 운동을 잘한다. 노래를 잘 부른다, 글을 잘 쓴다
직관적인 것 같지만 범위와 기준이 굉장히 모호하다. 행동의 목적성이 분명한 경우엔 ‘잘한다’는 것이 명확하다. 100m를 13초에 뛰는 사람이 15초에 뛰는 사람보다 달리기를 더 잘한다. 명확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13초에 끊은 사람이 15초의 사람보다 운동을 잘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달리기는 정해진 구간을 측정된 시간을 가지고 평가하기에 판단이 쉽지만, 대부분의 것들의 ‘잘한다’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일을 잘 하는 것인지, 운동을 잘한다, 노래를 잘 부른다 역시 명확한 기준과 판단의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행동에 목적이 존재하고, 그 목적을 평균보다 잘 달성하였고, 이를 대다수가 동의한다면 이때 그를 두고 그 행동을 잘한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무엇이 정말로 잘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3. ‘잘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의 지상명제다. 산다는 행위를 잘한다. 삶이라는 행동의 목적을 잘 수행한다. 살아가는 것에 목적이 존재하는가. 특정한 기준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이 과연 비교가 가능한 기준인가. 대다수가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소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비교가 성립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투성이, 모순덩어리의 명제다.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뭐가 잘 사는 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최고선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며, 이 최고선은 몇 개의 조건을 만족한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이런저런 노력을 하며 이성을 습관화시켜 행복이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알아보고, 생각해보면 가닥은 ‘행복’으로 잡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삶을 잘 산다는 것은 행복한 다는 것이고, 행복하다는 것은 삶을 잘 산다는 것이다. 순환논법이다. 잘 산다는 말을 행복이라는 말로 치환했을 뿐 해결되는 하나도 없다. 행복의 정의부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백명이 사람이 있다면 백개, 천개, 만개의 행복이 존재할 것이고 모든 행복은 누군가에게는 행복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있다. 수백 수천가지 행복에서 공통분모를 뽑아볼 수는 있겠지만, 너무나도 모호하고 드넓은 개념-만족이나 감사함 따위의 단어들이 나오며 또다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4. 잘 산다.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하다. 행복이란 기준을 어렵사리 정했지만,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기준에 줄 세우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기에 줄을 세울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 결과론적으로 행복을 줄 세우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넓고 비싼 집, 높은 연봉, 외제차 명품백과 같이 직관적이고, 남들과 비교할 수 있는 여러 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행복의 등수를 측정, 상대적 우월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행복의 순위를 매기려 든다.
행복의 순위를 매기려는 행동의 목적 역시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기 위함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순위를 매기려고 할수록 행복과는 멀어진다. 여러 가지 행동들이 구성의 오류를 범한다. 전투의 승리가 쌓일수록 전쟁의 승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경쟁에 중독되어 자신을 소모할수록, 자신을 노출시키고 남들을 관음할수록, 본래의 목표와는 점차로 멀어진다.
그렇다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오늘을 감사히 여기며 매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가 진정으로 잘사는 사람일 건데 이는 사람인 이상 불가능하다. 100m를 5초만에 달릴 수 없듯, 설계 자체가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만족을 가능하게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류 역사를 쌓아 올린 근본적인 동력은 만족을 모르는 욕구였다. 만족하는 순간 인간은 멈추고, 도태된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지독하게 악의적인 설계다. 만족할 수 없지만, 만족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저 갈망만 하는 거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전장에서 내가 챙길 수 있는 유일한 승리는 정신승리밖에 없는 듯 보인다. 이따금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만족감과 고양감, 충족감 정도가 인간에게 허락된 마지노선의 행복인 듯하다.
5. 쉽지 않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아니 그 이전에 잘 사는게 가능하긴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30평생 내가 봐온 사람 중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각자가 저마다의 고통을 버텨내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귀납적 추론이긴 하지만 반례를 본 적이 없기에 나에겐 참인 명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기에 모두가 행복을 바라는 건가 싶다. 아무도 행복을 모르기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 자체가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할 수도, 누구도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말장난이다.
나는 잘살 수 있을까.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202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