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만 하는 역할 행동
아버지가 타던 10년 된 차를 물려받아 몰고 다닌다. 여기저기 들이박아 휠이며 범퍼며 엉망이다. 아버지가 보기 흉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차가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죠.’ 라고 하며 그냥 타고 다닌다. 내비게이션은 삑삑거리는 게 시끄러워 선을 뽑았고, 핸드폰 번호는 에이포에 적어서 올려둔 게 일 년이 지나간다. 내가 내 돈 주고 산 차가 아니기에 정이 가지 않아서 그렇다고 주위에선 말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주위 시선에 둔감한 편이다. 대학교 때 항상 트레이닝복과 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신었다. 내일이면 기억도 못 할 불특정 다수들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친한 사람들에게 나의 옷차림은 의미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옷은 항상 편한 트레이닝복,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한 번씩 왁스를 바르거나 트레이닝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복장과 마찬가지로 언행에도 큰 꾸밈이 없었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고, 이는 나의 행동 가능 반경을 더욱 넓혀주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았다. 사회적 지능이 부족하지는 않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기대되는 수준의 언행이 가능했지만, 불편함을 느꼈다면 끊어냄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나에게 피로감이나 상실감을 주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관계를 정리했다. 덕분에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듯한 편안함이 언행에도 녹아있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니 매일이 특별한 날이고, 모두가 특별한 사람이다.
고객을 응대해야 하므로 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까지는 외/내적으로 나를 맞춰야 한다. 매일 깨끗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면도를 하고, 구두를 신고,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하고, 반음 올린 목소리를 튜닝한다.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정도의 외적 단정함을 갖추고, 필요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고객들과, 동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상대방에게 비칠 나의 말과 행동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처신한다. 배려심 있고, 친절하게 행동하며 퇴근 후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휴가 때 어디를 가서 어떻게 놀 건지 따위의 사생활을 늘어놓으며 유대감을 쌓는다.
직장인이 되기 이전부터 했어야 할, ‘기대되는 역할 행동의 알맞은 수행‘이란 거대한 의무를 의도적으로 유예한 반작용인가 이것저것 신경 쓰기가 벅차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 있다.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서, 평범한 보통의 직장인이 되기 위해선 정말이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딱 맞는 정장을 입으면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활동하기에는 굉장히 불편하다. 계속해서 입다 보면 어느 순간 적응하겠지만, 이게 불편하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도저히 해내지 못할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역할극을 진행하는 것 역시 불편하지만 적응되는 성질의 것이고, 하다 보면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구겨 신은 신발마냥 불편하지만 어째 저째 걸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딱 맞는 옷을 입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작위적인 표정과 듣기에 좋은 말을 하며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 내는 것. 남은 수십 년이 아득하지만, 어제보단 내일 더욱 익숙하고, 더욱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힘내자.
20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