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이 밥 먹여 주나, 이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이 소리의 내면에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돈 버는 일에나 매진하라는 일종의 폄하이기도 하고,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다. 문화예술이 밥 먹여 줄까? 밥 먹여 준다. 콘텐츠로 먹고살 수 있다. 또한 문화예술은 개인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치유로도 문화예술의 힘은 크다.
2020년 12월에 jtbc에서 《싱어게인》 오디션이 있었다. 오디션을 통한 30호 이승윤을 스타로 만들었고, 함께 참여한 다른 참가자들도 탈락 유무와 상관없이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주었다. 2020 흥행 성공으로 《싱어게인2》는 더 어마어마한 가창력을 가진 뮤지션들이 ‘한 번 더’ 슬로건에 맞추어 경연을 했다. 오디션은 끝났다. 시즌2에서도 역시 스타가 나왔다. 아마 시즌2에서도 또 하나의 개인의 역사는 이미 써졌다. 참가자 개인의 역사로, 보는 우리는 같이 즐거워하고 치유한다. 이런 것이 문화예술이 주는 힘이다.
코로나 초창기 시절, 이탈리아에서 아파트 발코니에서 탬버린을 들고, 혹은 바이올린을 들고, 혹은 보컬로, 각자의 음악적 방법으로 서로 달래며 치유했다. 2022우크라이나 전쟁터, 폴란드 국경선에 피아노가 놓여서 그 전쟁의 아픔을 달랬다. 문화예술의 치유의 힘은 이렇게 크다.
개인방송, 유튜버들이 각각의 채널로 밥 먹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막례 할머니의 콘텐츠 기획은 김유라 손녀가 기획하고 영상 찍으면서, 편집한다. 그냥 손녀라서 할머니를 찍고 있다,는 것만 보면 그거 너무 운빨인가 싶을 것이다. 그 친구 영상 관련 전공을 했고, 그 관련 일을 하다가 할머니와 여행 간다고 장기 연차를 신청했더니 회사에서 거절해서 이 참에 그만두었다, 라고 했다. 그 이후로 유튜브 채널 운영하여 소위 대박난 것은 뭐 온국민이 다 아는 일이다. 문화예술로 밥 먹고 있다.
어쩌다 문화라는 바닥에 병아리 기획자로 5년쯤 서식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있는 여전한 병아리 기획자이다. 어쩌면 병아리 기획자였기 때문에 그 바닥의 현실을 더 오밀조밀하게 들여다봤다. 열악하다. 언제나 허덕거린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늘 문화예술이 밥 먹여주나, 라는 걱정을 한다. 철없음에 혀를 끌끌차게 된다. 물론 문화예술 그 바박에서 널널하게 밥 먹고 잘 사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열악한 것도 사실이다.
『필름 2.0』의 마지막 공채 직원이었다는 《아무튼 계속》의 저자 김교석은 그의 책에서 회사가 망한 후 TV 예능을 마치 영화처럼 쓰는 글로 알바를 시작했다고 했다. 편의점 시급보다 나아서 시작한 일인데 10년째 TV 칼럼니스트로 지금도 일 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문화예술이 밥 먹여주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하면 여전히 설득이 약할까.
사실 요즘은 콘텐츠의 시대에 산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문화예술은 딱 밥 굶는다,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문화예술은 끼 있는 연예인들이 돈을 벌고 그 외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모두 가난뱅이로 산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콘텐츠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 1인 크리에이터들의 눈부신 활약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끼를 갖추고 있으면 그 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끼를 재능으로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 수익화하는 것은 사실 많이 어렵다. 그러니 여전히 문화예술이 밥 먹여주느냐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문화예술로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정부기관에서는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고, 대기업에서는 재정을 투자하는 형식의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이유도 사실 딱 거기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문화예술이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에 모두가 “예”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재능으로 밥벌이하고, 보는 우리는 문화 소비자가 되어서 그 문화를 느끼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