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시민들의 공동 할당 정원 ‘클라인가르텐’
남산 밑에 살던 시절, 마음이 갑갑할 때면 종종 남산 위로 치고 올라갔다. 중간 전망대까지 쉬지 않고 한 걸음에 올라가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머리로 한껏 피가 쏠리고 나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불끈불끈하는 사이 어지러운 마음도 풀어졌다. 산이 없는 베를린에서 가끔 남산으로 뛰어오르던 때가 생각난다. 가뿐 숨을 쉬며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던 그 저녁 빛이 그리울 때가 있다.
베를린에서 마음이 답답하거나 걷고 싶을 땐 집 근처에 있는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으로 간다. 작은 정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지인데, 작정하고 걸으면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 큰 부지다.
각각의 정원에는 작은 텃밭과 나무, 꽃, 창고로 쓰는 작은 건물 등이 있다. 창고는 정원을 가꾸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넣어두는 용도이지만, 넉넉한 크기로 개조한 ‘집’도 더러 있다. 사시사철 다르게 피는 꽃과 나무, 아담한 집들을 보며 걷는 길은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다. 갈 때마다 새로 피는 꽃에 감탄하고 오묘한 색에 매료된다. 클라인가르텐은 소중한 나의 산책길이자 힐링 장소다.
클라인가르텐은 '작은 정원'이란 뜻으로, 150년 넘게 이어온 독일의 공동체 문화다. 독일의 킬 Kiel도시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채소나 과일을 심어 먹을 수 있도록 작은 땅을 나눠준 것이 시초였다. 클라인가르텐은 슈레버가르텐 Schrebergarten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교육자이자 의사였던 슈레버 박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박사는 아이들이 늘 위험한 거리가 아닌 정원에서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랐다. 그의 사후, 가족들이 그를 기리는 광장과 정원을 만들었고, 식물을 직접 키우고 체험하는 정원이 나중에 아이와 부모들의 교육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작은 정원들을 슈레버가르텐이라 부르게 되었고, 1919년에는 ‘할당 정원 및 소규모 임대 규정’ 법률도 만들어졌다. 이것이 지금의 클라인가르텐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슈레버가르텐은 제1,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감자와 야채들을 공급하는 농지로 쓰이다가 전쟁 이후 꽃도 가꿀 수 있는 정원이 되었다.
주정부, 시, 철도국 등이 소유한 국공유지의 땅을 빌려 정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클라인가르텐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단지마다 소속 협회가 있고 이 협회들을 도와주고 관리 감독하는 지역 협회가 또 있다. 독일 내에는 이런 클라인가르텐이 백만 개가 넘으며 정원을 운영하는 이들도 4백만 명에 이른다. 정원을 이용하는데 따라야 하는 규칙도 있다. 정원의 면적은 베를린의 경우 보통 350㎡로, 안에 있는 집(창고)의 규모는 24㎡를 넘을 수 없다. 정원의 1/3 공간에는 과일과 채소 등의 작물을 재배하고, 1/3의 공간은 원예나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정원 내에서 바비큐는 허용되지만 캠프파이어는 할 수 없고, 튜브형 물놀이장은 설치할 수 있지만 땅을 파서 수영장을 만들 수는 없다. 클라인가르텐이 운영되던 초기에는 화장실과 전기도 없었다. 낮에 몇 시간 잠시 나와 정원 손질을 하고 가꾸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집 안에 부엌이나 화장실, 작은 거실 등을 둘 수 있고, 전기도 들어온다. 드물게는 주거용으로 허가를 받은 집들도 있으나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클라인가르텐의 울타리는 누구나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낮게 설치되어 있다. 정원을 지날 때마다 그때그때 피는 꽃을 한껏 구경할 수 있는 이유다. 1월이면 벌써 싹을 틔우는 개나리, 4월엔 벚꽃과 라일락, 5월엔 수국과 유채꽃, 6월엔 장미와 라벤더, 양귀비, 접시꽃 등이 핀다. 그 만발한 꽃을 구경하고, 수십 년 된 나무에서 과일이 열리는 걸 보고, 정원을 손질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주민과 눈인사도 한다. 주인들은 정원에서 딴 사과나 자두, 꽃들을 바구니에 담아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밖에 두기도 한다. 단지 안에는 작은 비어가든도 있다. 날이 좋은 주말이면 맥주 한 잔, 커피 한 잔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비어가든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람을 만나면 안 되고 집 밖을 나다니기 힘들었던 코비드 시대에는 클라인가르텐의 존재가 더욱 빛을 발했다. 좁은 아파트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정원에 와서 자연을 느끼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인가르텐은 은퇴한 노인, 어린아이가 있는 젊은 가족, 다문화 가족에게 먼저 할당되었다.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노인이나 아이들이 정원을 갖고 가꿈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휴식을 얻고, 자연을 배우며, 커뮤니티의 연대감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정원이 놀이터가 되고 점점 소외되는 노인들에게는 소중한 귀농 경험과 소속감을 주는 장소였다. 게다가 대단위 공동 정원들은 도시의 기온을 3-4도씩 낮추고, 적절한 공중 습도와 산소를 공급하는 환경 역할도 한다. 클라인가르텐이 독일 국민의 반 이상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클라인가르텐을 갖고 싶어 한다. 문제는 대기자가 너무 많다는 것. 베를린의 경우 기본 3-4년을 기다려야 차례가 오지만 최대 12년이 걸릴 수도 있다. 임대받은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정원을 가질 수 있고, 정해진 임대 기간도 없다. 개인 매매나 양도는 할 수 없지만, 정원 일을 할 수 없는 노부모가 직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요즘은 친구들끼리, 혹은 두 세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가든 셰어링’도 늘어나는 추세다. 1년 전부터 친구와 정원을 함께 운영하게 된 카타리나는 아들 유치원이 끝나면 거의 매일 정원에서 오후를 보낸다. 야외 정원에서 아이들은 맘껏 소리 지르고 안전하게 뛰논다.
정원을 갖기 위해서는 처음에 내는 집값과 매년 내는 임대비가 있다. 집은 협회의 중개와 절차에 따라 적정한 금액을 이전 주인에게 주고 사는 것인데, 한화로 보통 3000유로 정도의 비용이 든다. 정원 임대비는 매년 300-400유로 선.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평균 700유로 정도로 더 높지만 정원의 가치를 돈으로 따지자면 1500만 원을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일 년 임대비가 저렴할 수 있는 것은 정원을 관리하는 협회가 모두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있는 클라인 가르텐은 올해로 129주년을 맞았다. 125주년 행사를 진행했던 몇 해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원을 오픈해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하고, 지역 사람들을 반겼다. 정원을 지나며 항상 궁금했던 집 안에 들어가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조가 어떤지, 어떤 가구들이 있는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자두를 내놓은 정원의 한 할아버지 집에는 오래된 소파와 아담한 탁자, 그리고 작은 벽난로도 있었다.
공동정원을 가꾸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정원을 가꾸며 삶의 질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 가치를 지역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죠.”
이 글은 빌리브 매거진에 기고한 '독일 소시민들의 공동 할당 정원'을 다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