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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안에서 보내는 이색 휴가 아이디어 2

숨은 하천 찾고 물소 따라가기

by 베를린플레이크

베를린 도시 안에서 보내는 휴가 아이디어

아침에 일어나면 RBB 인포 라디오를 켠다. 커피를 내리고 아침식사를 하며 라디오를 듣는 건 매일 아침의 루틴. 라디오에서 나오는 내용은 남편이 듣고, 나는 (아직도) 음악을 주로 듣는다. RBB 인포 라디오는 음악 선곡도 좋지만, 흥미로운 도시의 소식이나 새로운 문화도 많이 소개한다.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곳이 적지 않다.

몇 해 전에는 멀리 휴가를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해 ‘홀리데이 앳 홈(Holiday at Home)’ 이란 주제로 베를린과 근교의 특별한 장소들을 소개했다. 베를린 안에서 즐길 수 있는 휴가 아이디어였는데, 리포터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나 건물, 호수의 궁전, 숨은 강가 등을 직접 찾아가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스무 곳이 넘는 리스트 중 흥미를 끄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수드 팡케(Süd Panke)였다.


베를리너도 모르는 작은 하천, 수드 팡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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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베를린에는 슈프레 강과 하펠 강만 있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서울의 청계천, 중랑천처럼 베를린에는 '수드팡케'라는 천이 있었다. 베를린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 베르나우(Bernau)에서 시작해 베를린의 슈프레 강까지 이어지는 29km의 긴 강줄기 ‘팡케’에서 흘러나온 작은 천이 '수드 팡케'였다. 그리하여 해가 쨍쨍한 어느 날, 수드 팡케를 찾아 나섰다. 출발은 슈프레 강변에 있는 ‘슈텐디게 베르트레퉁(Ständige Vertretung)' 레스토랑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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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단 배를 채우기로 했다. 레스토랑의 강변 테라스에 앉아 음식 하나를 시켰다. 네이버에는 ‘원조 슈바인 학센 맛집‘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던 분단 시절, 동베를린 안에도 서독 상주대표부가 있었다. 이 상주대표부를 일컫는 말이 바로 '슈텐디게 베르트레퉁'이다. 통일 후 베를린으로 수도가 정해지면서 본에 있던 많은 서독 정치인들이 정부 이전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와야 했고, 이 식당은 정치인을 위해 음식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본이 위치한 독일 서남쪽 지방의 전통 음식을 그대로 제공한 이곳에서, 정치인들은 매일 정치 이야기를 하고 고향의 음식을 즐겼다. 본과 가까운 도시였던 쾰른의 맥주, ‘쾰시‘가 이 레스토랑의 대표 맥주가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레스토랑 안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정치인과 유명인들의 사진은 당시의 역사와 시대 배경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 하겠다. 강변 테라스에 앉아 작은 맥주잔(0.25리터가 쾰시의 전통적인 사이즈다)에 나오는 쾰시 맥주와 생선볼 요리를 먹고 우리는 숨은 강줄기를 찾아 나섰다.


IMG_2872.HEIC 수드 팡케가 지나던 물길
IMG_4976.jpg 샤리테 대학 안에 남아있는 옛날 건물들

수드 팡케의 물줄기가 항상 드러나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부분은 건물 밑으로 묻혀 흐르고, 이미 말라서 물길만 남은 곳도 있었다. 베를린의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이 있는 ‘샤리테‘의 대학 부지 안에 그 오래된 물길이 남아있었다. 족히 100년은 넘은 듯한 대학 건물들이 뜻밖의 시골 정취를 내뿜어서 놀랐다. 베를린 중심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옛집과 나무들이 이렇게 숨어있다니! 나무가 우거진 잔디밭에는 대학생들이 모여 앉아있고, 학교부지여서 그런지 주변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잘 터졌다. 종종 공원을 작업실 삼아 다니는 우리 커플에겐 매우 탐나는 곳. 다음엔 노트북을 가져와 이곳에서 일하자고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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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CIA격인 해외 정보 기관 BND 건물

구글 지도를 보며 실 같은 강줄기를 따라 한 시간 넘게 북쪽으로 걸어갔다. 최근에 새로 조성된 수드 팡케 공원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새로 조성한 길과 물가의 우거진 풀숲을 들어설 때는 정말 청계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왼편으로 거대하게 서있는 독일의 연방정보원 건물(BND)이 걷는 내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한 육중한 직사각형의 건물들이 거대한 벽처럼 따라왔다. 공원 쪽에서는 이 건물의 한 면만 보이지만, 구글 지도로 보면 건물 단지는 상상을 초월하게 컸다. 자연적인 길과 인공적인 건물의 대조가 무척 기묘하게 다가오는 방케 길이었다. 한참 걷던 공원 길은 ‘펜스’로 느닷없이 막혀 있었다. 계속 조성 중인 듯했는데, 지금은 다 마무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도심의 길로 돌아와야 했고, 몇 시간 동안 짧고 미스터리 한 기행을 한 것 같았다.



베를린 늪지대에 물소가 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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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숨겨진 곳, 도시 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곳을 더 찾아가 보고 싶었다. 서울보다 1.5배가 큰 베를린에는 그런 비밀스러운 곳이 번잡한 동네에서도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마음만 먹으면 속속 찾을 것 같았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현지 친구에게도 그런 데가 있는지 물어봤다. 아들 하나를 둔 얀이 테겔 호수 근처의 '테겔러 플리스(Tegeler Fliess)'를 추천해 줬다.

“베를린 안에 야생 물소들이 사는 곳이 있어. 신기하지 않아? 테겔 호수 근처에 있는데, 아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어. 거기에 가면 도시 안에 있다는 걸 완전히 까먹게 되지.”

우리의 세일링 보트가 있는 테겔 호수 선착장에서도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당장 실행에 옮겼다. S반을 타고 20분가량을 갔다. 가장 가까운 바이드만 슬루스트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를 걸어가니 바로 늪지대가 있는 들판이 나타났다. 테겔러 플리스는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경계에 있는 30km의 또 다른 하천의 이름이며, 이 강과 가까운 들판에서 물소가 살고 있다. 축축한 땅과 풀숲이 무성한 들판에서 사는 물소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가는 길이 재미있는 건, 집들이 교외에 지어진 별장처럼 크고 근사했는데, 그 집들의 전망이 바로 이 들판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집 앞의 좁은 흙길만 건너면 바로 물소를 볼 수 있었다.

“오! 저기 봐봐! 여우야!”

집들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녹조가 번진 하천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속삭였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밝은 갈색의 여우가 총총총 남의 집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작고 보송한 여우가 느긋하게 동네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좀 더 걸어가니 이번엔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동물을 그려놓은 표지판이 보였다. 물소뿐만 아니라 학, 수달, 물뱀(베를린에서는 거의 뱀을 볼 수 없다) 등이 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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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물소 때문에 슬슬 힘이 빠지려는 무렵, 드디어 물소를 만났다. 검은 물소가 일곱 마리나, 시원한 진흙에 모여 앉아 질겅질겅 풀을 씹고 있었다. 야생이라고는 하지만, 보호구역 안에서 시의 관리를 받는 거였고, 한쪽 귀에는 번호표 같은 것도 달고 있었다. 울타리 위에 올라가 목을 빼고 쳐다봤다. 좀 움직여주면 좋으련만 땡볕을 피해 앉은 물소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우리와 같이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말을 꺼냈다.

“길을 따라 좀 더 가면 거기에도 물소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요. 여기보다 더 가까이 볼 수 있고요.”

그곳을 거쳐 여기로 왔다는 그녀의 보물 같은 한마디에 우리는 다시 길을 걸었다. 이제는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서. 그녀의 말처럼 탁 트인 들판에서 소들이 모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망원 렌즈를 가져와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울타리 근처까지 바로 다가와 풀을 먹고 있는 물소를 숨죽여 쳐다봤다. 스무 마리 가까이 구경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대지의 사파리였다. 아이가 있는 가족이라면 한 번쯤 데려와도 좋을, 기대 이상의 공짜 휴가지다. 정수리가 뜨겁게 달궈지는 날씨였다. 그래도 나무가 가득한 숲길은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풀숲을 헤치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한참을 쳐다보고 발견한 건 검은 야생돼지. 다음에는 꼭 망원경을 챙겨 와야지 생각하며 우리는 베를린 동물의 천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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