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갈까?"
썩 괜찮은 글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시작점이 될만한 글을 적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술을 마신다. 얼마 전 '이태원 클라스'를 보다 참지 못해 마셨던 소주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꼭 럼콕이어야만 했다.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의 서막에 소주는 어색했다. 마침 집에는 이고르 씨가 선물해준 럼이 남아 있었고, 김은 빠졌지만 약간의 콜라가 냉장고 안에 있었다. 한잔을 가득 따라 럼콕을 만들었는데 콜라가 모자라 럼의 비율을 높였다. 그래서인지 한잔이지만 내 속을 버리기에는 충분한 럼콕이 완성되었다. 아내는 한입 맛보고서는 머리가 아프다며 먼저 자러 갔다.
연애 초반에는 우리도 곧잘 술을 마셨다. 신논현 골목에는 언제라도 충분할 만큼의 식당이 있었고 우리는 보통 고깃집에 갔다. 몇 종류의 고기를 양껏 시키고, 소주를 곁들였다. 보통의 고깃집이 그러하듯 그 도넛 모양의 가운데가 뚫려있는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가운데에는 찌개를 얹고 서로의 잔을 채우고는 했었다. 자글자글한 그 느낌. 그 시절 나는 그런 류의 데이트가 퍽이나 낭만적이라 느꼈던 것 같다. 문제는 레퍼런스가 다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사실 삼겹살만큼이나 스테이크를 좋아하고, 냉면만큼이나 파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도 곧잘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는 데려가지 않았던 거야?, 허구한 날 고기만 먹으러 다녔잖아"
라고 아내는 심통이다.
"하지만 그대신 맛있는 고깃집에는 잔뜩 갔었잖아."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건 그래." 적어도 이것에 대해서는 아내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좋은 고깃집이라 하니 여기서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노벰버'라는 펜션에 가는 길에 들른, 삼정이라는 고깃집이다. 고기꾼으로써의 자부심을 가진 나이지만, 1위를 뽑는 것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삼정 때문이다. 너무나 가정집 주택처럼 생겨서는 동시간대에는 손님을 받지 않는 모던함이라니. 하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이 고기를 대하는 마스터의 자세이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맛이다. 가업을 이어받는 마스터의 자제는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하는데 옆에 앉아 고기를 구워주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김해보건대 축산학과에서는 도축하는 방법 역시 배우는 모양이다. 하긴 생고기라는 것이 고기를 산채로 잡아먹는 것도 아닐뿐더러, 병들어 죽은 고기를 먹기에는 왠지 꺼림칙하니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채식주의자분들께는 참 죄송하지만 좀 비정한 이야기가 떠올랐다.(채식주의자께서는 뒤로 돌아가세요. 흑흑) 그러니까 훌륭한 고기업자라면 고기를 도축하는 과정 역시 꽤나 중요한 과제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기분 좋게 생을 마감한 고기와 살기 위해 힘을 다 쓰고 어렵게 세상을 등진 고기의 맛은 같을 리가 없다는 가정은 너무한 걸까.
하지만 내 생각에 분명 고기 업계의 대가들은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을 것 같다. 한 분야의 대가들은 뚜렷한 목표를 위해서는 놀라울 만큼의 냉정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어느 날 맛있는 쇠고기가 필요해진 마스터는 건장한 소 한 마리를 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봐, 소 친구. 오늘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갈까?"
가만히 풀을 뜯어먹던 소는 이야기를 듣고 솔깃하긴 하지만, 이내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싫어, 오늘 뭔가 당신 수상한걸. 나는 그냥 집에서 건초나 먹을래." 소는 대답한다.
소의 통찰력에 마스터는 내심 놀랐지만 이내 작전을 바꿔보기로 한다. 다른 소들과의 비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그럴수록 다른 멍청한 녀석들이랑 차이가 없어지는 거야.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는 거라고. 후회하지 말고." 마스터가 말했다.
소는 생각한다. '다른 멍한 녀석들과의 차이?' '그래, 나는 멍청하고 흔한 소가 아니지.' "알았어 가자고 마스터." 소는 그렇게 다른 녀석들과의 비교 전략에 넘어가고, 이윽고 방심하던 사이 마스터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된다.
"크헉, 마스터 너마저...."라 말하며 쓰러지는 소. 의식이 없어지는 순간 그는 읊조린다. '나 역시 한낱 멍한 소에 불과했던 것인가....' 소에 관한 슬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사실 소는 멍청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소에 비해 마스터가 너무나도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던 것뿐이다. 대가는 재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비로소 알을 깨고 각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세계는 항상 비정하기 마련이다.
럼콕에 머리가 지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럼콕을 마시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는 소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이왕 실컷 이야기를 떠들어댄 김에, 소에 대한 미안함으로 한마디를 더해야겠다. 그러니까 이 세상도 알고 보니 거인들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면, 오늘 밤의 나는 기분 좋게 나사가 풀려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거인의 뒤를 쫓아 가지 않을까.
*
1. 글을 다 쓴 후, 도축에 관해 약간 찾아보았습니다. 가벼운 기분으로 썼고, 가볍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만 도축을 하시는 분 그리고 소에게 알 수 없는 미안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 마스터와 소의 사이에는 주로, 총격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양측의 노고에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2. 소에게의 무분별한 폭행을 행사함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3. 소의 상태는 실제로 육질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외적인 요소는 당연, 내적 스트레스도 포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