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를 하셨는데, 그 과정에 성경 필사가 있었다. 신앙심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공부라 필사를 귀찮아하셨지만, 우리가 처가에 가면 그간의 성과를 자랑처럼 꺼내놓으셨다.
'은총 성경 쓰기'라는 책이었다. 왼쪽엔 성경 구절이, 오른쪽엔 깨끗한 공백이 펼쳐진 필사 전용 노트였다. 장모님이 음식을 하시는 동안, 숙제를 거들어드린다며 펜을 들었다. 한참을 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재미있었다. 그렇게 장모님의 숙제는 내 취미가 되었고, 난 사랑받는 사위가 되었다.
재미를 붙여 신약부터 구약까지 필사 책을 전부 샀다. 생각이 많은 날이면 집이나 회사에서 노트를 펼쳤다. 누가 보면 신앙심이 깊은 줄 알겠지만, 순수한 취미였다. 그렇게 루카복음 5장 33절을 만났다. '새것과 헌것'에 관한 논쟁이었다.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복음 5장 37-38절)
막내가 결국 옆 팀으로 가고 난 뒤, 나는 수신 감도 낮은 안테나를 그쪽에 세우고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묵은 포도주만 고집하던 그 팀장은 '새 포도주'인 막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막내의 말투에도 날이 섰다. 팀 전체가 얼어붙어 있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불호령에 모두가 바짝 긴장한 것이 눈에 보였다. 웃음이 사라졌다. 우리 팀에서라면 웃고 넘겼을 사소한 일들이 그곳에선 날카로운 마찰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 포도주가 낡은 부대를 터뜨릴 가능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 긴장감이 벽을 넘어 전해졌다.
막내와 A를 동시에 불러내어 밥이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발을 뗄 수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오래된 문제는 그대로 둬야 한다. 내가 해결하겠다고 뛰어드는 순간, 그 문제는 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헌 술은 헌 부대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우리 팀은 잘 돌아갔다. 놀라울 정도였다. 막내가 떠난 자리를, 예전 A를 험담하던 그 후배가 훌륭하게 메우고 있었다. 내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 이상을 충실히 해냈다.
문득 내가 옆 팀으로 가겠다며 팀장에게 격노를 샀던 그 행동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나의 그 '과한' 행동이 있었기에, 팀원들은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공유했다. 그렇게 흩어져 있던 '점'들은 '선'으로 연결되었다. 헌 포도주인지 새 포도주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비로소 한 부대에 담겨 함께 익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A 험담했다던 그 후배 있잖아요. 오빠 다음이 그 후배죠?"
"어. 맞아요. 내가 말했었나?"
"아뇨.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그 후배가 오빠 다음 순번일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어요?"
"그 후배, 원래 나서서 일하는 스타일은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이번엔 오빠가 사고 치고 난 다음에 알아서 업무 분장 싹 다 하고 팀 정리했다면서요?"
"그렇죠. 정말 고마워요. 평소엔 절대 그럴 친구가 아닌데. 각성한 것처럼 열심히 해요."
"그러니까. 계산 빠르고 머리 좋은 후배 같네. 그 후배, 가까이 두고 잘 지내요. 오빠한테 도움 될 사람이야."
찌개를 떠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밥알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영업팀 부장의 '짬'은 차 선배의 통찰과는 다른 날카로움이 있었다.
후배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맞다. '선의'를 '의심'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오해'와 '반목'의 씨앗이 된다. 설사 후배가 나를 자신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헌 부대'로 여긴다 해도, 그건 내 문제지 후배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성장을 지원할 뿐이다. 의심할 이유가 없다.
정성이 담긴 식사뿐만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조언을 건네는 아내가 고마웠다. 오늘은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 아내는 산책을 좋아한다. 강아지처럼, '산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표정이 밝아진다.
저녁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간식을 사 먹는 것은 우리의 소소한 행복이다. 오늘은 좀 더 멀리 걸어봐야겠다. 호호 불며 먹는, 아내가 좋아하는 붕어빵이라도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