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희생'과 나의 '쓸 수 없는 답'
1996년도 나의 중학교 입학식, 전교생이 500명이 넘던 90년대 중학교 입학식 풍경은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항상 운동장이었다.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사이로 선생님들이 어슬렁거리고, 교단 위에는 교장 선생님의 기나긴 훈화 말씀에 비례하여 학생들의 자세는 흐트러져 있었다.
중앙을 에워싸고는 학생들의 가족들이 꽃다발을 들고 자녀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학부모들과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맘으로 가족들이 있는 주변을 바라본다. 그때, 흰머리가 성성한 아버지가 홀로 서 계신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서.
3년 전,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운영하셨던 영도다리 근처에 있는 선박 공업사를 매각하신 지 얼마 안 된 직후였다. 아직도 30년이 지난 그날 아침을 생생히 기억한다. 현관문을 나가시던 아버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집에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 어머니와 다급하게 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급하게 여기저기 병원을 다녔던 그때 그날 아침을.
3명의 딸과 막내아들, 홀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거친 사람들과 마주하며 88 서울 올림픽에 따른 경제 성장의 큰 시대 흐름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업을 일으키고, 새 집을 사고, 홀어머니를 모셔오고, 가족과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거제도에서 첫 가족 캠핑을 하고, 밤낚시하시는 아버지 옆에서 짙은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밤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할 그때에는 몰랐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약 1년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를 업고 용하다는 병원, 지압소를 드나드느라 가세는 완전히 기울고, 우리를 돌봐 주시던 할머니는 둘째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시는 것을. 그렇게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셨고, 남은 우리들은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음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깨어나셨고, 그 후로 오른쪽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실 수 없으셨다. 거동이 불편하셨다. 말씀도 어눌하셨다. 내가 알던 그 아버지가 아니라 어리고 내가 돌봐줘야 할 동생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상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어린 난 그게 너무 싫었었다.
난 당시 아버지의 인생에 관심이 없었고, 밖에서 함께 놀아야 할 친구들이 중요했었다. 하지만, 난 아버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난 아버지의 유년 시절 일부와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팔다리를 주무르려면 항상 옆에 있어야 했으니까.
그전까지 아버지는 밤늦게 술냄새에 까칠한 수염으로 내 얼굴을 비벼대는 무섭고 불편한 사람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급하게 집으로 들어와야 했었다. 감히 아버지에게 말대꾸조차 할 수 없었고, 무섭고 엄하셨다. 그리고 항상 공부를 하라고 하셨고, 성적에 관심이 많으셨다. 술을 드시고 집기를 부수시고 난폭하게 구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와 내 누이들은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께 맞은 적이 없다.
아버지 팔다리를 주무르며, 함께 티브이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 몇 가지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이 있었다. 통영에서 대통령이 졸업한 중학교에서 학업 성적이 우수했지만, 회비를 내지 않아 도둑 수업을 듣다 선생님한테 쫓겨난 이후 학교를 그만 다녔다는 사실. 한 번씩 만나시는 전자회사 친구분이 그 학교 동문 출신이라는 것. 생계를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통영 자기 기술부터 이런저런 기술을 배우셨다는 것.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매우 하고 싶어 하셨고, 잘하셨다는 것, 시 쓰기를 좋아하셨다는 것, 돈을 벌기 위해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파병에서 용맹함과 동시에 그만큼의 참상으로 악명 높았던 맹호부대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 부하들이 너무 많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심적으로 힘들어 그만두셨다는 것. 포항제철 입사 시험에 기술자로 합격하셨다는 것. 월급이 너무 작아서 사업을 하시게 된 사실들 등. 아버지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는 당시에 난 몰랐다.
아버지는 가난한 가정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나마 남아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재산은 큰아버지가 상속하셨다. 아버지는 혼자 일어나셔야 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시고 실제적으로 장남의 책임은 온전히 지게 되셨다. 그 마지막 책임이 홀어머니를 모셔오시는 것이었고, 2층 새집을 장만하자 그 책임을 다하실 수 있게 되었다.
한날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쓰러진 날, 의식이 없으셨을 때 아버지는 꿈을 꾸셨는데, 그 꿈에서 저승사자로 보이는 사람이 자기를 따라가자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해서 안된다'라고 답하셨다고 하셨다. 초등학생밖에 안 된 어린 나는 그때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나는 지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다니고, 신축 브랜드 아파트에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 매번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투덜대면, 어김없이 등짝을 맞는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네 명의 자식도, 온전히 부양해야 할 홀어머니도 없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해서' 저승사자를 돌려보내셨지만, 나는 '내 맘속 옹이들' 때문에 사직서를 만지작거린다.
사내 인생의 가장 전성기 시절에 중풍으로 뇌병변 2급 장애 판정을 받으시고 고단한 삶을 사셨지만 단 한 번도 남 탓을 한 적 없이 당당하셨던 흰머리 성성한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의 답은 '희생' 그 하나로 명쾌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왜?
아버지의 사용설명서는 땀과 굳은살로 명료하게 쓰여 있었다. 하지만, 나의 사용설명서는, 어쩌면 이 질문으로 첫 장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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