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가로등 그리고 와인바
“여어, 마틴. 오늘은 일찍 문 열었네?”
“헤이, Choi! 너 왜 이리 요즘 뜸해? 많이 바빠?”
지난 9년간 내 테니스 코치이자 친구인 마틴은 3년 전부터 와인바를 운영하고 있고, 나는 그곳을 아지트 삼아 혹은 단골술집 삼아 자주 드나들곤 한다. 하지만 지난 몇 주간은 출장이 잦아 오랜만에 이 친구를 보았다.
슬로바키아.
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나라인지라, 슬로베니아 혹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아니냐는 말로 도리어 질문을 받곤 한다. 하기야 한국의 친구, 가족들조차도 관심이 없다. 그저 외국에 사는 친구가, 동생이, 때 되면 한국에 와서 술 한 잔 하고 돌아가는, 그런 정도일 뿐.
나도 14년 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에 관심도 없었고,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삼성전자 슬로바키아에 취직을 하여 일을 하러 왔고, 살다 보니 많은 매력을 발견하게 되어 그냥 이 나라에 눌러 살게 되는, 그런 흔한 케이스였다.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
동유럽의 이 작고 아담한 나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
마틴의 와인바는 다운타운의 한쪽 구석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가끔은 미로가 되어버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방향을 잃기도 하는 그런 골목이다. 바닥은 한 400년쯤 된 돌로 만든 마차길 같은데, 비라도 살짝 내리면 그 돌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왠지 마법사가 들고 다닐 법한 느낌이 난다.
한국에서 혹은 다른 유럽에서 손님이 오면 나는 꼭 이 와인바를 데려간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만나는 골목들과 바닥길, 가로등들이 잠시나마 우리를 동화 속으로, 과거 속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천천히 다운타운을 걷는다. 조용하고 아담한 동유럽의 작은 도시의 다운타운을.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H모군이 있다. 협력업체 총각 과장이었는데, 약간은 당돌하면서 쿨한 녀석인지라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건방져 보이지만, 열 살이나 차이가 있는 나에게는 형, 형 그러면서 잘 따랐다. 가끔 다운타운의 단골 펍에서 맥주도 한 잔하면서 자신의 슬로바키아 여자와의 연애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때마침 옆 테이블에 아리따운 두 명의 여대생이 있었는데, 이 친구, 잠시만 기다리라며 씩씩하게 여자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셋이서 한참을 희희덕거리면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약간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내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형, 재네들이랑 같이 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쟤네들이 형이 유부남 아니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는데." 하며 미안한 얼굴을 한다.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보고. 아들 녀석과 챔피언스리그를 같이 보기로 한 시간도 다가온지라, 맥주 값을 쥐어 주면서 "다른 친구 불러서 잘 놀고, 나중에 보고해라." 하며 자리를 떴다.
그녀들은 지방에서 브라티슬라바 구경을 온 대학생들이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매주 금요일, 토요일 밤이면 지방에서 브라티슬라바 다운타운으로 구경 오는 시골 젊은이들이 많다고 했다.
작고 볼 것 없는 도시이지만, 여름이 되면 이곳도 관광객들이 있다. 비록 유명 관광도시의 몇 십 분의 일 수준이지만, 나름 깃발을 들고 있는 가이드를 따라 십여 명의 이방인들이 줄지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래봐야 브라티슬라바 다운타운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고, 특별히 내세울 만한 관광 상품이 없다. 브라티슬라바 성,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도시의 명물인 세 아저씨 동상들. 아마도 이 정도. 세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귀에도 잘 안 들어오고 관심도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
브라티슬라바의 다운타운은 조용히 주변을 음미하며 걸어야 맛이 나는 곳이다.
가장 중심부인 칼튼호텔과 구 오페라하우스 사이의 지점으로부터 천천히 외곽으로 빠진 다음, 천천히 달팽이 모양으로 중심부를 향해 산책하다 보면, 브라티슬라바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수녀원도 있고, 테이블이 두어 개만 있는 와인바도 있다. 다른 유럽의 유명 다운타운과는 달리, 골목이 많고, 반대로 사람이 없어 한적한 느낌도 난다. 그러니 어느 가게엘 들어가나 대접 받을 수 있고, 바가지요금도 없다. 상냥한 슬로바키아 점원들의 모습에서 잠시 힘든 일상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나절 정도에 돌아볼 여정으로, 여유로운 보폭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면, 어느새 이 도시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하지만 겨울이 되면 분위기는 바뀐다.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기운까지 도는 다운타운. 3시가 지나면 금세 어두컴컴해지며, 여름철의 나른함조차 전혀 없다. 카페나 레스토랑의 문틈으로 간간이 새어 나오는 불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더욱 썰렁하게 만든다. 눈 내리는 밤이라면 당장이라도 '성냥팔이 소녀'가 앞치마를 두른 채로 저 앞을 걸어가고 있을 듯한 착각도 든다.
그 위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가로등도 눈에 들어온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가로등 같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다. 별이 너무나 작아서 하루가 1분인 별. 그래서 어린왕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수없이 가로등 불을 끄고 켜기를 반복했던 아저씨.
이 골목 어딘가에 어린왕자와 가로등지기 아저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