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시 1등급 UX #2
(책은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대신 급히 작성했어요. 포트폴리오 진단은 세번째로 ㅎㅎ)
“UX 책은 여러 권 읽었어요. 그런데 막상 과제를 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UX 책을 읽었는데 왜 실력이 늘지 않을까요?”
"추천되는 책에 나오는 사례가 오래되서 별 도움이 안되요."
주니어 디자이너와 학생들에게 자주 듣는 말입니다. 책을 읽고, 필기하고, 요약까지 하지만 막상 실무 과제를 만나면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합니다. 그러다 책을 읽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 원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UX 입문자의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책으로) 기역자를 배웠지만, 낫이 기역자인 줄 모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UX 책은 현상의 특징을 뽑아낸 추상화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실제 디자인은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복잡한 상황입니다. 즉 실제는 여러 개념들이 혼재되어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어포던스(affordance)는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과 인간심리』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문 손잡이는 잡아당길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설명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디자인에서는 언제 어포던스가 반드시 필요하고, 언제는 불필요한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런 판단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막상 실제 디자인에서는 적용이 어렵습니다.
피드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급 단계에서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만 해도 성장이지만, 고급 단계에서는 “피드백이 어떻게 제공되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 틀린 건 알 수 있지만, 대안을 어떻게 만들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책은 단순한 팁 모음집이 아닙니다.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책을 썼는지, 어떤 이론적 기반 위에서 주장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UX 책이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그 책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고, 저자가 무엇을 주장하려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가 반쪽짜리입니다. 예를 들어, 『디자인과 인간심리』는 단지 여러 심리학 개념을 나열한 책이 아닙니다. 노먼은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사람의 인지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철학을 담아, 디자이너들이 실무에서 꼭 고려해야 할 인지심리 기반 원칙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단편적인 팁 모음으로만 받아들이면, 그 안의 원칙들을 언제, 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미술 작품을 볼 때 작가의 생애와 시대 상황을 모르면 그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겠습니다.
겉보기엔 낭만적인 그림 같지만, 사실은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던 시절, 고독과 신에 대한 갈망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맥락을 모르고 보면 그저 예쁜 그림일 뿐입니다.
UX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자의 주장과 관점을 이해하려면 관련 이론과 배경 맥락까지 함께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요약해둔 글만 읽고 넘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개념은 아는데 실제로 적용은 더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책을 고르는 눈높이도 문제입니다. UX 디자인도 학문이기 때문에 여러 주장과 관점이 공존합니다. 여기에 특정 화두(예: AI, 서비스디자인, 메타버스)가 뜨면 관련 서적이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요. 표지만 보면 모두 “정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이·대상·목적이 제각각이라 입문자가 좋은 책을 고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입문자에게 특히 어려운 지점은 기초서와 응용서의 구분입니다. 아직 기본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응용서부터 집어 들면, 읽는 동안은 그럴듯하지만 자기 실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려한 사례집도 비슷합니다. 영감을 주지만, 원리·용어·판단 기준이 잡혀 있지 않으면 “좋은 사례 구경”으로 끝나죠.
AI와 UX를 예로 들어볼까요? 요즘은 AI로 디자인 산출물을 빠르게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인기가 많습니다. 이런 책은 분명 유용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AI를 활용한 사용자 경험의 기획”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관점에서는 『인터페이스 없는 인터페이스』처럼 경험의 패러다임 변화를 다루는 책이 더 적합합니다. 결국 “무엇을 배우려 하는가”에 따라 책의 선택이 달라져야 합니다.
UX는 책만 읽는다고 단숨에 실력이 느는 분야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무협 영화처럼 비기 한 권을 익히면 곧바로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론을 학습하고, 작은 실습을 반복하며, 이를 오랜 시간 축적해야만 역량이 만들어집니다.
전문 분야 대부분에는 이론과 실제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 초반의 암흑기가 있습니다. UX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학생 시절에는 『디자인과 인간심리』를 읽고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나서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는 일정 수준의 경험과 학습이 쌓여야 이론이 연결되고 비로소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책 읽기는 출발점일 뿐,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습니다. 학교의 좋은 커리큘럼에서는 작은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하여 이론과 실제를 조금씩 연결할 기회를 줍니다. 하루이틀에 끝낼 수 있는 작은 문제를 여러 번 풀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역량이 쌓인 이후에야 큰 프로젝트가 의미를 갖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말하듯, 꾸준한 학습과 실습의 양적 축적 없이는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UX 역시 예외가 아니며, 책 몇 권 읽고 곧바로 고수가 되길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습과 실습의 균형을 유지하며, 이를 긴 시간 동안 축적해 나가는 태도입니다.
책은 정리된 결과물이라 저자가 왜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개념을 만들었는지는 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강연에서는 책을 쓰게 된 맥락과 저자의 관점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서 발표를 듣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강연 영상을 찾아보고, 잘 가르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야 책을 단순히 ‘지식의 나열’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문제의식과 관점을 나의 사고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례로 저는 『디자인과 인간심리』를 여러 번 수업에서 사용했습니다. 반복적으로 다루다 보니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아래 그림)를 정리할 수 있었고, 이 틀이 생기자 각 장에서 소개되는 디자인 원칙들이 어떤의미를 가지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체계 덕분에 책의 내용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증언해주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일상생활에서 학습한 개념을 적용하는것입니다. UX는 책으로 개념을 알았다 해도, 실제 문제에 적용해보지 않으면 금세 잊히고 이해도도 얕아집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안에 끝낼 수 있는 작은 과제들을 여러 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교의 잘 짜인 커리큘럼도 이런 작은 문제 해결을 반복하면서 학생들이 차츰 이론과 실제를 연결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발견한 불편함을 직접 개선해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작은 문제를 여러 번 풀어보면서 UX 사고와 방법론을 체화하는 과정입니다. 일곱시 UX에서도 이러한 작은 실습 과제들을 만들어 두었으니, 꾸준히 풀어보면서 역량을 쌓는 훈련을 해보길 권합니다.
세 번째 방법은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책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우는 데 그치곤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적용되는지, 다른 이론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계속 질문하면서 읽는 태도입니다.
UX는 실제 맥락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읽으면서 바로 작은 사례에 적용해보고, “이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 맞고 어떤 상황에서는 맞지 않을까?”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살아 있는 사고 도구로 변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정련(elaboration) 과정입니다. 배운 것을 곱씹고, 정리하고, 내 언어로 다시 설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챕터를 읽고 나면 “이 장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을 스스로 묻고, 다른 장에서 배운 것과 연결해 보는 훈련을 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책이 단순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정보가 아니라, 실제 문제 해결에 쓸 수 있는 지식으로 정착됩니다.
네 번째 방법은 UX 바이블 책을 읽는 것입니다. 팝송에서 Old but Gold(오래됐지만 여전히 빛나는 것)라는 표현이 있듯이, 오랫동안 널리 읽히는 책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디자인과 인간심리』, 『Don’t Make Me Think』 같은 책들은 수십 년간 꾸준히 인용되고 읽히며 UX 분야의 기본기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물론 책 속 사례들이 지금 보면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에 가장 적절한 예시였다는 의미일 뿐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례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다루는 개념과 원리입니다. 그 개념을 이해하면 오늘날의 새로운 환경과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입·주니어 디자이너들에게는 디자인 원칙의 기본이 되는 개념을 이해하고 실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잠재력(Potential)이 매우 중요합니다. 회사에서 신입을 뽑을 때도 “지금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보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느냐”를 더 중시합니다. 바이블 책을 통해 기본기를 다진 사람은 이후 어떤 도구나 트렌드가 와도 빠르게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제가 추천하는 UX 기본서들입니다. 이 책들은 UX라는 분야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학생과 실무자에게 출발점이 되어 줍니다.
『디자인과 인간심리』, Donald Norman: 심리학 기반 디자인 원칙
『Don’t Make Me Think』, Steve Krug: 사용성
『경험디자인의 요소』, Jesse James Garrett: UX 전략부터 디자인까지 연결
『UX 팀 오브 원』 , Leah Buley: 주니어 디자이너 실무 가이드
『인터페이스 없는 인터페이스』, Golden Krishna: AI 적용하기
결국 책은 지도와 같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길을 잃고 전체 지형을 파악할 수 없듯, 책은 우리의 사고에 뼈대를 세워줍니다. 하지만 지도를 본다고 여행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길 위를 직접 걸어보고, 때로는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면서 경험을 쌓아야 진짜 실력이 됩니다.
UX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은 방향을 잡아주고, 실력을 만드는 건 결국 당신의 발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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