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라 Jul 12. 2023

왜요? 왜 거짓말을 해요? (4부)

거짓말 기초. 고전적 정의와 담론

지금까지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는 네 편이나 했습니다. 왜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까지 합쳐서 말이지요. 가급적이면 쉽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제 생각들을 구석구석에 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쉬운 말로 설명을 해서 그럴까요? 거짓말에 대한 담론 중에서 '뭣이 중헌 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가볍고 짧게 이야기했더니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을 직접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제 생각만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그건 니 생각이지"하고 읽으시는 분들이 코웃음을 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몇몇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남기신 말들을 조금씩 (제가 감히) 가져와 봤습니다.




먼저, 거짓말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와 담론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직설적으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허구, 상상, 농담 같은 것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모두 사람들이 꾸며낸 말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들이 모두 나쁘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칭찬하고 즐기며 때로는 그런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서 접하는 거짓말은 참이 아니기 때문에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글들을 통해 인류가 공동체 내부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왔는가에 대해 설명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 시절 엄마가 "거짓말하면 맴매한다"라고 들었고, 실제로 엄마가 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리라는 어리석음 때문에 맴매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은 나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래서 거짓말은 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아!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하지만 그 거짓말들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사람이 아무런 이득을 취할 생각이 없었고 상대방에게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거짓말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 중에서 특히 순수한 무해함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 남들과 비교할 때 고결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던 분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진실함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한 자신이 끊임없이 남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대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러한 행위에서 오는 도덕적 갈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그랬을 겁니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겠어요.


중세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이들에게 정직은 미적인 필수품, 즉 내적 순수를 위한 강력한 필수품이었습니다. 자기기만, 불성실성, 비진정성 같은 것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어도 위선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세상 어디서든지 위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위선에 대한 공포는 여지없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러한 담론에 주목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결국 위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 죄악들 가운데 위선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그런 고전적인 담론이 다룬 핵심적인 주제는 '무엇이 거짓말인가'였습니다. 자세하게 풀어보자면 수많은 거짓말 중에서 어디까지 용인하고 어디부터는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었습니다. 세상은 거짓말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것들을 가려내고 수용해야 할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고, 일정 수준으로 결론을 지을 때까지 매우 지난한 논의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어찌 보면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담론은 놀랍게도 철학사 중심부에 거대한 똬리를 틀고 앉아 비킬 줄 몰랐습니다.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선생님은 그러한 고전적인 담론들을 “참이 아닌 역사가 아니라 무해하고 무고한 역사, 위증과 잘못된 증언이 없는 ‘가상’ 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해하고 무고한 가상으로 치부할 수 있는 거짓말이 있다면 반대로 진짜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누군가 한 말이 참이 아니라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니, 거짓말이면 거짓말이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또 무슨 궤변이야?”


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 선생님이 하신 말을 함께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말한 것은 참이 아니다. 분명히 내가 틀렸지만, 나는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의였다”라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내가 말하려던 바가 아니다. 진심으로,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거기엔 오해가 있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한 말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그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통상 우리는 참의 반대가 거짓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참 true의 반대는 거짓 lie가 아니라 틀림 false 또는 잘못 wrong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시험문제에서 정답을 고르지 못했다고 거짓을 행했다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저 틀렸거나 실수를 했을 뿐이지요.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분명 '그럼 거짓 또는 거짓말의 반대는 뭐지?'라는 의문이 떠오르실 겁니다. 거짓말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앞선 고전적 정의를 따르자면 여기서는 정직(또는 솔직) honesty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뭔 소린가 하시겠지만, 이건 뒷부분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이나 상태가 아니라 발화한 의도나 목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Saint Augustine 선생님은 우리가 의도를 기준으로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발화한 것들을 진짜 거짓말이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 말로 다른 사람에게 위력을 가하거나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발화한 것뿐 아니라 정치인이 법률을 제정하는 것,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 행정가가 정책을 집행하는 것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말이나 다른 행위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통제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을 진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데리다 선생님은 이걸 수행적 폭력 performative violence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적 폭력은 실제적인 폭력이 아닌 행위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폭력들은 주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가하고 사회적 계급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만일 누군가가 나쁜 의도나 목적으로 행한 것이 아닌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고 심각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일부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풀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고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의도하지 않은 진짜 거짓말은 거짓말이라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맹목적으로 상부 지시에 순응했을 뿐이며, 자신은 숭고하고 선한 목표에 헌신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아우슈비츠 전범들에게 죄가 없다는 논리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선생님은 나치와 같은 시대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멈춰서 생각하고,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유하지 않음이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주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발화하는 주체도 발화 대상이 되는 타자도 본질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객체 배경에 진정한 본질적 주체가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거짓말에 대한 담론은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느껴집니다. 무엇이 거짓인지, 진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보아야 하는지도 점점 더 구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데리다 선생님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반-진실 contre-vérité'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진정한 주체에는 있는 본질이 타자에게는 결여되어 있다고 상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를 각자 경계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지 않거나, 세상을 오로지 나와 외부로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며, 통제할 수 있는 범위도 나라는 주체에 한정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 범위 바깥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든 행위나 현상들이 결국은 내가 인식하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단순하게 주체와 객체로 구분하면 매우 위험해집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도 주체와 대립하는 객체도 결국에는 또 다른 주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객체들이 모여 특정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사회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온통 거짓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제도와 사회적 규율도 본질적으로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기기만’을 기반으로 한 체제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데아 IDEA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그래서 흠결을 찾기 어려운 로고스 LOGOS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늘 꿈꾸고 지향하는 미래나 내일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수께끼나 난센스 퀴즈처럼 들리지만) 미래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착했다고 환호하는 순간 미래와 내일은 저만치 앞서 우리를 뒤돌아 보며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내일을 향해 달립니다. 손에 잡힐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내일이면 내일은 오늘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꿈꾸었던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제 우리가 꿈꾸었던 내일과 같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진실을 깨닫고는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우리가 꿈꾸는 내일은 오지 않고, 우리가 꿈꾸지도 노력하지도 않아도 어차피 다른 내일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제도와 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요? 모니터 화면에서 고개를 들어 눈을 천장으로 향하게 한 다음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흠 없이 완벽한 제도나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준수하는 법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도나 법률이 너무 이상적으로 보여도, 너무 꿈같이 보여도, 그것이 아름다운 이상을 품은 것이라고 동의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 제도와 법률에 기꺼이 구속시킵니다. 그리고는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스스로 정한, 아니면 최소한 스스로 동의한, 자칫 지나치게 엄격하게 보이는 굴레에 자신을 가둠으로써 평안을 얻습니다.


저는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사유하기를 멈출 생각도 없습니다.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완벽한 내일을 꿈꾸고, 그 내일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고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참고자료

주디스 슈클라, 일상의 악덕, 나남, 파주, 2011.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이숲, 서울, 2019.

이진우,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휴머니스트, 서울, 2019.

매거진의 이전글 왜요? 왜 화를 내요? (2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