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달만 목포 (1)
여행기 서문은 떠나기 전에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녀와서 깨달았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느낌은 나쁘지 않습니다. 마치 이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를 혼자 미리 보고 와서 친구에서 "난 보고 왔는데 있잖아, 주인공이 말이야......."라고 놀리는 기분입니다. 어찌 되었든 목포에서 한 달 체류하며 걸어 다닌 기록을 위한 첫 번째 서문을 올립니다. 두 번째도 있습니다.
이 서문은 논문, 책, 음악, 영상 같은 지적 콘텐츠를 몸속에 구겨 넣느라 (물리적 또는 심리적) 엉덩이가 심하게 무거워져 버려서 머나먼 타지 목포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기 힘들어하는 지식인 Intellectual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목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통계청에서 발표한 인구분포도를 순진한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보자면 앞에서 규정한 '그 또는 그녀'가 머물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서울이나 경기지역일 확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디지털 노매드 digital nomad 시대를 상징하는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라며 욱하실 유목민 遊牧民과 "이제 겨우 서울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 조용하고 안정적인 터전을 찾은 나는 갑자기 미개인 未開人이 된 거냐?"라며 항변하실 낙향민 落鄕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유목민이 아니라 개척자 開拓者이며, 낙향민이 아니라 낙향족 楽鄕族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그저 통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한 지식인은 아니라고 감히 비난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당신이 딱 한 달 목포에서 체류하기에 도전할만한 용기를 (아직은!) 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후딱 겁을 집어먹을 만큼 위험한 일도 아닙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줄리앙 방다(혹은 벤다) Julien Benda가 이야기한 것처럼 화형에 처해지거나 추방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됩니다. 대한민국은 방다가 살았던 프랑스나 그가 치열하게 토론했던 스페인이 아니라고요? 직장에 한 달 휴가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은 추방을 자청하는 것하고 같은 의미라고요? 물론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당신에게 학교와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을 포기하라거나 또 다른 삶을 찾아서 떠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관행적이고 수동적이며 이타적인 삶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능동적이며 이기적인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고 있는 겁니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용맹한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지만 사실은 외로운 길냥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에요. 당신이 타고 있는 F1 경주용 레이싱 자동차가 이제는 전력질주하고 있는 메인 트랙에서 잠시 벗어나서 피트 pit로 들어가서 닳아버린 타이어도 갈고, 에너지도 보충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가 내지른 질타와 폭언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영원할 것 같아 모든 걸 내어주었던 연인이 내던진 배신이라는 카드로 심리적 붕괴 상태에 놓여있다는 걸 말이지요. 그러나 복수할 방법도 기회도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하는, 그저 '난 괜찮아, 괜찮다, 괜찮을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멍청한 마법사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밀려 올라오면서 반문하고 싶을 겁니다. 한 달 살기를 떠나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되냐고 말이죠. 그리고 왜 하필이면 목포냐고요. 뭐, 앞선 질문에 답을 하자면 굳이 한 달을 꽉꽉 채워서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목포가 아니어도 상관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공들여 레벨과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는 인생 여정은 멈출 수 없는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이 돌아가는 운영체제와 같습니다. 전능한 신과 무능한(?) 부모가 만들어 준 운영체제 속에서 우리는 학교라는 프로그램도 돌렸다가 직장이라는 네트워크 플레이에도 참여했다가 연애와 결혼이라는 동맹을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 정교한 시뮬레이션 같은 이 게임에서 정지 purse 버튼이 아니라 나가기 exit 버튼을 눌러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게임에는 나중에 다시 참여하면 됩니다. 세이브 포인트 save point는 잘 저장되어 있을 겁니다. 전원 버튼을 꺼버리거나 코드를 뽑아 버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지 버튼이 친구나 연인과 함께 떠나는 휴식 같은 주말여행이라면, 나가기 버튼은 '이래도 진짜 문제없을까? 다시 돌아가도 내 자리가 그대로 있으려나?'라는 의구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드는 메이저 리그팀 부상자 명단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메이저 리그에서는 선수가 경기나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하면 일단 출전 선수 명단 Roster에서 제외합니다. 그리고 부상 정도에 따라서 15일이나 30일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서 선수를 보호합니다.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 선수는 해당 기간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회복과 치료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메이저리그 경력도 인정되고, 구단에서 선수 보유권도 유지해 주기 때문에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인생이라는 경기를 치르면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더 좋은 성적을 내려는 욕심이나 다른 선수로 대체될까 하는 두려움으로 부상을 숨기거나 치료를 미룬다면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선수생활을 그만둘 정도가 아니라면 부상자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치료를 받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좋습니다. 한 달 살기도 그런 것과 같다고 생각합시다. 출전선수 명단에서 부상자 명단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돌아가는 거라고 말이지요.
아! 왜 목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치 않은 듯하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안지는 '진정한 지식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라는 오래된 논쟁에 대한 소소한 견해로 채울 수 있겠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목포야 말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시간을 내서 살아봐야 하는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네, 맞습니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를 제쳐두고서라도 목포에 가야 합니다. 먼저 '지식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여기에서 깊은 철학적 고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신 왜 목포라는 도시에 차분히 머물면서 둘러보고 이해해야 하는가와 연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과거 아주 먼 옛날에는 아주 소수만이 지식인으로 불렸습니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독점하고 그로부터 부나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 용이했습니다. 라틴어로 적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제들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거치면서 자리 잡은 공교육 영향으로 소수만이 누리던 지식인이라는 다소 허세가 양념으로 뿌려진 것 같은 타이틀을 대중들도 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점점 가속화되었고, 지금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대까지 도달했습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검색에 필요한 아주 짧은 시간만 허용된다면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식하다거나 뭘 모른다는 비난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암기하지 못할 텐데 구글이나 네이버를 불러내서 찾아보는 자신과 무슨 차이가 있냐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물리학을 연구한 사람도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 표면에 정보가 저장되는지 소멸되는지 또는 이중슬릿 실험 Double-slit experiment 결과를 가지고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아니냐는 거죠.
하지만 목포는 다릅니다. 책이나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정보만으로는 목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거나 심지어 부정확합니다. 서울에서 너무 멀고 한때는 잊힌 도시였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누군가 잘못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다른 사람이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그걸 다시 다른 사람이 받아 적으면서 올바른 것으로 둔갑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하나 봅니다. 직접 가 봐야 합니다. 존경하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축적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멀리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사는 이들과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 대해서 읽고 들은 지식으로 생긴 상상입니다. 그 상상은 가공이라 거짓이기 쉽고 그래서 힘이 없습니다. 여행을 통해서만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포는 1897년 개항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 물결이라는 직격탄을 맞고 거대하게 팽창했다가 지금은 수축해 버린 상태입니다. 섬에서 이주한 몇몇 어민들만 생계를 꾸려가던 땅이 메워지고 다져지면서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거대 항港이 되었다가, 지금은 심심한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라한 요트나 태워주고 으스대는 초로初老 선장들만 활보하는 골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오랜 세월 역경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변신을 통해 생존해 온 저력이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120여 년 전에 일본인들이, 아니 조선 초 우리 선조들이 뛰어난 안목으로 고르고 골라낸 땅입니다. 그 잠재력은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가슴 벅찼던 다양한 역사적 흔적들이 지문地文landscrip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W. Said는 아리안, 흑인과 같은 인종적 구분과 동양, 서양과 같은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랜 기간 동안 우롱해 왔는가를 지적했습니다.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필연적으로 강제당한 언어, 전통, 역사적 상황, 소속감 같은 것들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사회가 꼬깃꼬깃 심어 넣어준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안주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그걸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편하다는 걸 오랜 정주定住를 통해 깨달아 버린 겁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식인은 달라야 합니다. 부모, 선배, 친구들이 은근히 강요하는 삶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를 세상 경계 밖으로 내몰아야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선조들은 다른 포유류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호기심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만큼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그런 호기심과 적응력이 인류가 생물학적 우위에 있지 않으면서 생태계 정점에 군림하고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시가 베푸는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중독되어 허우적거릴 때 위대한 개척자와 낙향족들은 허술한 지도를 살피거나 근거 없는 여행기를 탐독하며 억누르기 힘든 은밀한 매혹을 느꼈습니다. 지도와 여행기가 그들에게는 나아갈 바를 밝혀주는 소중한 경전이었습니다. 개척자와 낙향족, 그들이야말로 우리 인류를 살리고 널리 퍼뜨린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떠납시다. 목포로. 한 달 정도 체류하고 돌아오면 그때 제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지식인이 되었다고. (제 인정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참고자료
에드워드 W. 사이드, 최유준 옮김, 지식인의 표상, 서울, 마티, 2012.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서울, 안그라픽스, 2012.
승효상,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파주, 돌베개, 2016.
승효상, 지문地文, 파주, 열화당, 2009.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서울, 청미래,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