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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라 Sep 07. 2023

아직 오지 않은 과거

목포진

당신이 사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아시나요? 가문 대대로 그곳에 터를 잡고 번성해 왔으며, 당신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타지 사람이 그곳으로 여행을 간다며 제일 먼저 어디를 가는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곳을 추천하시겠습니까? 답을 선뜻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목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앞서 말한 조건에 부합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디를 추천할까요? 지역 랜드마크? 맛집?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 자연풍광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곳? 목포로 장소를 한정한다면 답은 한 곳으로 수렴될 겁니다. 바로 목포진 木浦鎭입니다.


목포진은 랜드마크도 맛집도 촬영지로 유명한 곳도 아닙니다. 길가에서 보면 조금 높은 언덕에 불과합니다. 목포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 무심하게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자칫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옆을 지나다 보면 자그마한 공원에 서 있는 작은 표지판 하나만이 근처에 목포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목포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왜 첫 번째 방문지로 목포진을 꼽을까요? 그건 목포진이 목포라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성장해 온 기나긴 역사에서 출발점과 같은 상징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목포진을 "원도심의 배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항구도시의 시작점"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목포진이야말로 "목포라는 도시의 정신적 뿌리"라고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목포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군사조직체계인 진관체계 鎭管體制 중 진 鎭에 해당하는 조직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라도 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전라수영 全羅水營에는 목포 木浦·조양 兆陽·옥구 沃溝·흥덕 興德 등 4개 진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후 성종 10년(1479)에 전라수영이 분리 개편되면서 목포진은 우수영 관하 임치첨절제사영이 지휘하는 8개 만호진 중 하나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치첨절제사영이 지휘하는 만호진은 어란포, 금갑도, 목포, 다경포, 법성포, 검모포, 가리포, 군산포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많은 진들 중에서 목포와 군산을 제외하고는 큰 항구도시로 발전한 곳이 없습니다. 대부분 아직도 작은 포구에 불과합니다.

무안 목포진지도 務安 木浦鎭地圖. 북쪽에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유달산. 남쪽에는 삼학도. 가운데 목포진에는 객사, 아사, 사령청, 옥獄과 우물까지 그려 넣었네요. 

 

목포진은 목포시 만호동 일대에 있습니다. 만호동이라는 이름도 목포진을 지휘하던 무관계급인 만호 萬戶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만호라는 계급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대장(중령) 정도 되는 계급으로, 지역에 있는 가구(민호 民戶) 만호 정도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남도 서남단에 위치하며 영산강과 서해가 만나고, 남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인근에 있는 수많은 섬과 접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목포를 해상 요충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수군기지를 두어 외적으로부터 주민들을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다른 수군 진과 함께 폐진될 때까지 목포진은 목포라는 곳이 존재하는 이유였습니다.


이제부터 목포진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KTX 목포역을 내려서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면 목포 원도심 여행에서 기준이 되는 역전파출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산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커다란 물고기 동상이 '민어의 거리'라는 글씨와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을 보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녹슨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제 절반 정도 왔습니다. 이곳에서부터 갑자기 비릿한 바다내음과 알싸한 홍어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내가 항구도시에 온 것이 맞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준다고 할까요?


이곳을 지나 한 구획을 더 걸어가면 왼편으로 부둣가 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서 걸으면 문득 커다란 나무 한그루와 보일 듯 말 듯 목포진 근처에 다 왔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서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주민을 위한 소소한 운동기구와 벤치가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자, 목포진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언덕을 향해 작은 길이 나 있습니다. 제법 경사가 있어 보입니다.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목포의 배꼽'이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경사로를 따라 힘차게 발걸음을 해 봅니다. 주변 대부분은 새롭게 조성되어 깔끔한 공원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덕을 더 올라가면 오래된 나지막한 건물들과 높은 축대면을 마주치게 됩니다.

사진에서 목포진을 찾아보세요. 마치 월리를 찾아라 수준입니다.


언덕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면 드디어 잘 단장된 목포진역사공원이 보입니다. 입구를 상징하는 홍살문, 그 뒤편으로 성곽일부가 보이고, 만호가 집무를 보면서 머물렀던 객사가 있는데, 모두 최근(2015년)에 복원되어 새 건물입니다. 복원된 객사를 끼고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면 목포 원도심과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달산이나 노적봉에서도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포진에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손에 잡힐 것만 같습니다. 도심을 걷는 사람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조금 멀리 삼학도 앞을 항해하는 요트까지 모두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목포진 언덕 정상에서 주변 전경을 보고 나면 선조들이 이곳에 목포진을 설치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897년, 목포라는 도시는 개항과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목포진이라는 군사기지에서 외국과 교역하는 근대 항구도시라는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개항과 동시에 일본 영사가 목포진 건물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 다음에는 영국이 영사관 부지로 활용하기 위해 일대를 모두 매입하고 비석을 세우며 정비작업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자 일대 부지를 전부 민간인들에게 매각하면서 오랜 기간 목포를 다스렸던 목포진 부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목포진유적이 있던 곳이라는 작은 비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눈부신 민주화를 이루며 이전에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둘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된 것들을 다시 들추어 연구해서 현대화된 도시에 옛 모습을 함께 덧입히기를 원했습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그걸 가능케 할 능력과 여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1991년, 목포시민들은 목포가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자본으로 세운 근대화 도시이자 수탈을 위해 사용된 항구라는 오명이자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어 했고, 역사바로 세우기 첫 번째 사업으로 목포진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폐허 속에서 유물을 발굴하고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24년 동안 73억 원을 투입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겨우 갖출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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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1895년 목포진은 폐진되었지만 부속건물들은 개항을 위한 기관들이었던 '감리서'와 '해관'이 사용했습니다. '감리서'는 개항장에서 외교와 통상 업무를 전담하기 위한 관청이었고, '해관'은 항구를 입출항하는 외국 선박들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외적에 대비하던 전통공간에서 통상을 위한 근대공간으로 탈바꿈했던 것입니다. 감리서는 목포진 건물을 수리해 사용하다가 1902년 9월, 현 북교통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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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진은 전통과 근대 모두를 상징하는 유적입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역사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목포진은 목포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목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목포진을 복원하고 그 자리를 목포를 상징하는 곳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아직은 완벽해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적 고증과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이미 교회와 사찰과 민가들이 들어서 있는 곳을 이전 모습으로 다시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더 뜨거운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선조들이 이곳에 목포진을 세웠던 이유는 아마 이곳 지반 전체가 단단한 암석으로 이뤄져 있기에 자연재해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도심, 항구, 영산강 하구 그리고 근해 섬들이 모두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목포는 근대화 도시나 수탈항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포에 남아 있는 많은 관광 유적들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지고 만들어진 것들뿐입니다. 이제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남도 1000여 개 섬들을 돌보는 수도', '동북아와 세계로 나아가는 물류항'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는 목포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직 오지 않은 과거'입니다.



참고자료

홍순재, 판옥선 학술 복원 보고서,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1.

1897개항문화거리 스토리텔링모임, 1897개항문화거리 스토리텔링북, 목포, 목포시, 2019.

최성환, 목포, 파주, 21세기북스, 2020.

김재석, 목포, 광주, 문학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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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것들>

*목포진 유적공원 바로 옆에는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있습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안군 하의도에서 나고 자라다가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목포진 언덕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목포진 중턱에 영신여관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목포진 유적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는 소년 김대중 공부방을 보고 자연스럽게 계단길로 항동시장으로 가면 됩니다.

*목포진 유적공원을 오르는 언덕 중간에 교회와 작은 사찰이 나란히 서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찰은 '약사사 藥師寺'로 일제강점기 세운 일본 불교 포교소였습니다. 언덕 전체가 거대한 암반이기 때문에 공간이 매우 좁고 길쭉해 2층 법당에 불상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당에 1935년 조성된 불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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