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적봉
"오라는 곳 많아도...곧 죽어도 이곳에...뿌리를...깊숙이 내린 것은
저놈의 웅크린 산 때문이다." -김재석 시詩 '유달산' 중에서-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곳은 바로 랜드마크 landmark입니다. 원래 랜드마크는 먼 거리에서도 보이기 때문에 여행이나 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있는 위치나 방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높은 지형, 건물 같은 표지점이나 참조물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관광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단순히 높아서는 안되고 직접 올라가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높다고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역적 정체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관광객들만 찾는 곳이 아니라 지역주민들로부터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장소야 말로 진정한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 관점에서 목포라는 도시를 바라보겠습니다. 높아서 멀리서도 보이고, 역사성도 가지고 있으면서, 지역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지역주민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곳. 바로 유달산 한 자락인 '노적봉 露積峯'입니다.
그런데 왜 유달산 자체가 아니라 그 끄트머리 한 자락일 뿐인 노적봉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적봉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때문입니다. 노적봉은 목포를 상징하는 수많은 전설과 역사들을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 바위를 볏짚으로 덮어서 곡식을 쌓아놓은 낟가리처럼 보이게 하고, 여성들에게까지 군복을 입혀서 둘레를 돌게 해서 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강강술래도 그 전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세요. 유달산이 아무리 유명한 산이고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특히 타지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즐기기 위해 목포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더 멀리까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있을까요? 노적봉에 오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자, 유달산이 아니라 노적봉을 올라가 보겠습니다. 겨우 해발 60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노적봉을 오르려면 목포역에서 노적봉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도 산인데 가파르고 힘들지 않을까 겁내지 마세요. 목포역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역전파출소가 있습니다. 역전파출소에서 쉬엄쉬엄 걸어도 10분이면 노적봉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건널목을 지나면 작은 네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그곳이 노적봉길이 시작하는 곳입니다. 멀리서 보면 조금 가팔라 보일 수 있지만, 주변에 다양한 음식점과 가게 그리고 볼거리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가는 내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대략 절반쯤 걸어 올라가면 왼편으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을 한 동상과 사찰입구가 보입니다. 두 동상은 출가하기 전 젊은 박재철과 출가 후 법정 스님 모습입니다. 동상 뒤에 보이는 독특한 모습을 한 사찰은 법정스님이 불교에 귀의한 곳으로 유명해진 '정광정혜원'입니다. 원래 이곳은 1911년 일본인 승려 도현 화상이 한반도로 건너와 포교를 하려고 일본식 사찰 건물을 짓고 포교소로 개설한 곳입니다. 이후 1917년 흥선사로 개창하였고,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후 대한조계종 만암 스님이 이를 정광정혜원이라고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이 매우 특이한데 한국 전통 사찰들은 예불을 드리는 법당과 스님들이 생활을 하는 요사체가 분리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이곳은 두 곳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높고 뾰족하게 솟은 지붕, 지붕과 처마가 연결된 각진 형태가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 형태입니다. 우리나라에 지어지고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정광정혜원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골목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합니다. 목포시가 조성한 세계예술벽화 골목입니다. 이곳 벽화들은 목포 출신 예술인들을 담고 있는데, 한국 극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썼고 드라마 전원일기 초대작가로 유명한 차범석, 승무와 살풀이춤 두 가지 분야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인물인 우봉 이매방,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시초로 평가받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목포가 경상남도 통영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술의 도시로 불리는 통영은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등 우리나라 예술계 거목들이 나고 자라며 예술혼을 키운 곳으로 유명합니다. 통영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고 어족자원이 풍부한 어촌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그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서면서 정기적으로 고급 무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그들이 한양에서 주기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상품들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러한 복합적인 영향으로 통영은 지역 경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문화・산업・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목포도 그와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영에 비해 시기가 다소 늦지만, 개항 이후 외국문화와 산업이 급격하게 유입되었고,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함께 자연스레 호남지역에서 문화・산업・경제 측면에서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해방 전까지 목포는 전국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였고, 지역에 민족자본으로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인 위원회에는 무안, 진도, 제주, 강진, 해남, 장흥, 영암, 영광, 완도 등에서 온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목포도 통영 못지않게 풍부한 자본과 산업기반 그리고 다양한 문화경험 등 예술가들을 배출하기에 적합한 토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벽화를 통해 목포 출신 예술인들이 남긴 자취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노적봉 입구에 다다르게 됩니다. 계단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노적봉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바위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담합니다. 그저 봉우리라는 이름에 만족할만한 크기입니다. 유명세에 비해 노적봉이 다소 아담해서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왜 그리 유명하지? 아무리 역사인지 전설인지 모를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명성에 비해서 볼품이 없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노적봉을 올라보면 달라집니다. 둘레길 따라 돌아서 올라가면 커다란 시민종각과 셀 수 없이 많은 기념식수들로 장식된 새년년시민의종기념공원이 나옵니다. 왜 이곳에 거대한 종이, 그것도 '시민의 종'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런 의문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목포MBC 옛터'라는 작은 표지석을 발견하면 궁금증이 사라집니다. 이곳은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목포시민들이 독재와 폭압에 항거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개항으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 현대에 이를 때까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근대화 물결을 가장 먼저, 제일 앞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극복하고 좌절하고 받아들였던 목포. 노적봉은 단순히 역사적 명소가 아니라 목포 시민들이 품어왔던 집단기억 colletive memory과 정체성 identity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가 자신들이 경험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품고 있는 규범적 지평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와 개인들의 행동을 정의하고, 장기적으로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하는 지침으로 작용합니다. 사회는 기억을 선택하고, 그 기억을 상징물로 만들어 보존합니다. 그것이 바로 집단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이고, 상징물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구성원들이 선언하는 맹세입니다.
이곳을 직접 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김재석 시인이 쓴 구절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곧 죽어도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목포라는 사회 공동체였으며, "저놈의 웅크린 산"은 그냥 자그마한 봉우리가 아니라 개항 이후 100여 년을 거치며 형성된 집단기억이자 정체성이었습니다. 노적봉이 그곳에 있는 한 목포 그리고 목포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는 지속될 것입니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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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1]
새천년시민의종 공원 구석에는 '목포기상대 터' 표지석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 근대적인 기상관서를 설립했던 때가 1904년 3월이고, 그때 처음 만들어진 목포기상대는 신안군 하의면 옥도리와 대의동을 거쳐 1906년 8월 이 자리에서 91년 동안 기상관측을 맡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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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2]
이곳이 목포시민들의 기상과 정기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은 조선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도 이곳이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적봉 뒤쪽 바위에 쇠말뚝을 38개나 박았습니다. 그 현장에 가면 쇠말뚝 구멍과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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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목포문화원 편집부, 목포문화, 통권 154호, 목포, 목포문화원,2021.
Kathrin Bachleitner, Collective identities amid war and displacement: Syrians and Syrian refugees re-imagine their country, Nations and Nationalism, Volume 28, Issue 1, Jan 2022, pp. 177-193.
최성환, 목포, 파주, 21세기북스, 2020.
[관람 정보]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641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 제한 없음
[주차 정보] 전용 주차장 있음.
[유의사항]
*유명한 장소이다 보니 주차장도 꽤나 넓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에 주차요금이 있습니다. 그래도 승용차의 경우에는 한 시간은 무료.
*주차장 한편에 노적봉관광안내소가 있습니다. 개인은 어렵지만 20명 이상 단체관람객이 사전에 예약할 경우 해설사가 동행해 설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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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것들>
*새천년시민의종 공원에 있는 종각 현판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입니다.
*새천년시민의종 공원을 내려오다 보면 가지가 얽히고설킨 큰 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팽나무 속 폭나무인데, 다산목 또는 여자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신을 이루게 한다는 전설과 임진왜란 때 왜군들을 물리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노적봉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 있으니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맞은편이 유달산 입구이고, 유달산 공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노적봉 전경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것이 유달산 공원이고, 유달산 공원 전경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곳이 노적봉입니다. 거의 같은 공간에 있으니 올라가 보세요.
*노적봉 주차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면 근대문화역사공간과 목포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노적봉 예술공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목포를 대표하는 서양화가 김암기 화백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있고, 해설사분의 친절한 설명도 들을 수 있습니다. 노적봉까지 걸어 올라오느라 조금 지쳤을 몸을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