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달만 목포 (2)
왜 서문이 두 개나 있냐고 물으실 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이게 무슨 세월이 오래 흘러서 개정판을 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언어로 번역판을 내는 거라면 이해하겠는데 뭐 하러 서문이 두 개나 필요할까 싶으시죠? 당신 말이 옳습니다. 본격적인 여행이야기를 읽기도 전에 지쳐버리겠다고 투정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래에 이어집니다. 누가 뭐라든 목포 한 달 살기 기록을 위한 두 번째 서문을 올립니다. 세 번째는 없습니다.
이 서문은 어디에 구속되거나 얽매이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며, 기분이 내키면 언제든지 훌쩍 떠나려고 옷방이나 침실 한쪽 구석에 캐리어를 꺼내놓고 살고 있는 방랑객 strider을 위한 서문입니다. 본격적으로 서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네요.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방랑객이 도대체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을 말이죠. 사전적으로 방랑객 放浪客은 방랑자 放浪者와 유사한 표현으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겨우 끝에 있는 한 글자 차이지만 어감이 사뭇 다르고 사람들이 둘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더 많이 다릅니다.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방랑자라고 하면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방랑자라고 하면 부랑아로 묘사되거나 거지 또는 도적으로 오해받기 쉬운 존재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방랑객은 조금 다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낯선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지친 발걸음을 쉬고 배를 채우기 위해 여관이나 음식점에 들어서 돈을 꺼내 보이는 순간 자者는 객客이 됩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에서 품위가 느껴진다고 칭찬하게 되고, 조금 전에 무례하게 대한 것을 사과하기도 합니다.
그보다, 앞선 문장에서 뭐 좀 어색한 것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방랑객이라고 쓰고 그 옆에 영어 단어 strider를 붙여놓은 것 말입니다. "응? strider? 방랑객이 영어로 strider야? 가만가만, 찾아보니까 방랑객은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고, 방랑자는 wanderer, vagabond라고 나오는데?" 맞습니다. 제대로 찾아보셨네요. 방랑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을 고르자면 베가본드 vagabond가 되겠네요. "응? 베가본드? 그 미야모토 무사시를 원작으로 한 만화 베가본드?" 맞습니다. 이번에도 제대로 짚으셨습니다. 잦은 휴재, 그것도 장기간 연재 중단으로 악명이 높은 그 작품 베가본드가 그 베가본드입니다. 그럼 스트라이더 strider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뭐가 있을까요? 잘 모르시겠다고요? 음, 존경하는 톨킨 J. R. R. Tolkien 선생님이 쓰신 유명한 소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 3부작 중에서 첫 화를 기억하시나요? 영화에서 가장 멋진 등장인물 아라곤 Aragon이 처음 여인숙에서 모습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키며 스트라이더라고 수군댔습니다.
영화와 만화 속 등장인물로 비유해서 조금 이상하게 느낄 수 있지만, 방랑자 vagabond와 방랑객 strider 둘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는 목표와 의지에 있습니다. 만화 베가본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운명적으로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며 차츰 성장해 나갑니다. 근본적으로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천운과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뛰어난 조력자를 얻지 못했다면 결코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스트라이더는 다릅니다. 애초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각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해하고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참고 견디며 적당한 때가 되기만을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경험이나 여정은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의례에 불과합니다. 방랑객이 strider라는 의미에 맞게 성큼성큼 걷는 것은 그가 가야 할 바를 알고 가야 할 이유를 이미 가슴속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조작적 정의 操作的 定義 Operational definition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가 진짜 두 번째 서문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방랑객, 스트라이더입니다. 늘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은 것도 원래 당신이 방랑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당신이 존귀한 존재이며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어야 마땅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당신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머나먼 여정을 마치고 나서 왕으로서 귀환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아무 곳이나 가서 아무 사람이나 만나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짧은 여정이어서는 안 되며 너무 가까운 곳으로는 부족합니다. 가급적 당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아마도) 가장 먼 땅, 과거 찬란했던 영광을 잃고 쇠락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잠재력이 꿈틀대는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짧게는 120여 년, 길게는 600여 년 역사가 아로새겨져 남아 있는 곳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당신은 잘 모르지만 선조들이 오래도록 꾸었던 화려한 꿈들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상처 입고 아팠던 기억들이 수많은 전설들과 함께 묻혀있는 곳을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게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아! 물론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함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떠나는 기나긴 여정에 반드시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비록 키가 작고 초라해 보여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에 비해 아주 많이 부족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는 당신이 왕좌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할 호빗 hobbit이 되어 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귀환할 때 왕좌에 오를 자격을 입증할만한 곳만 찾아 떠나면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요? 당연히 목포입니다.
참고자료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불안, 파주, 이레고석,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