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장담합니다. 그건 바로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가급적 오해가 없도록 상대에게 전달해 봅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수룩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 뿐입니다. 그게 반복되다 보면 속으로 '아, 이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상대하지 말아야지.'라거나 '나랑 생각이 다르네. 아무리 설명해도 내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던 거라면 어떨까요? 비슷하게 보이는 단어와 문법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내가 하는 말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말이죠. 단어 뜻도 다르고 문법 체계도 차이가 있다면 그것처럼 당황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와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당신'이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나요? 무슨 개떡 같은 이야기냐고요? 그냥 떠오르는 걸 이야기해 보세요. "날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워워. 진정하시고요.
제가 말한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그 '당신'과 의미가 다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있는지 어원사전에서 찾아보면 當身 즉 자기 자신 또는 자기 몸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한자어를 중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놀랍게도 중국어로는 '책임을 지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게 뭔 소리인가 헛갈리죠?
일부 학자들은 한국과 중국이 동일한 뜻으로 사용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에 와서 단어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원래 고대 한국에서 상대를 친근하게 부르던 호칭인데 그걸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자를 차용해서 표기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뭐 오래고 오랜 옛적 일을 누가 정확히 알겠어요. 오늘 지금 일어난 일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데 말이에요.
무슨 말이 하고 싶냐고요?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모든 뜻을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수백 수천 단어를 쏟아냅니다. 그 모든 말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우리는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서로가 사용한 단어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것과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님은 누군가 무슨 질문하면 "먼저 그 00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부터 정의해 봅시다."라고 이야기하나 봅니다.
최근에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 매우 재미있었어요. 뭐가 재미있냐고요? 그 사람은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금방 자기 이야기로 몰고 갑니다. 그건 내가 말이야....... 아니 내가 옛날에 그걸 해 봤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말하는 방식과 정반대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상대가 친밀감을 느끼도록 유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속마음도 털어놓지 않고 고민도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과거에 누구를 만났다거나 가족들이 나를 어찌 힘들게 하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제게서 들은 사람은 제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없습니다. 대신 제가 경험한 것이나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약간 양념을 첨가한 이미지로 추출해서 객관화한 다음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제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말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사람이나 저나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사용하는 단어도 다르고 말하는 형식에서도 크게 차이를 보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같은 거라고요. "날 좀 바라봐줘." "날 사랑해 줘."
이야. 그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까요?
문득 나와 같은 단어, 같은 문법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요. 마치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순간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와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존재하냐고요? 물론입니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잘 이해하는지 신기한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데에 0.25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느낌, 그런 관계, 그런 상황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던 그가 오늘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멍텅구리입니다. 심지어 눈도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내 말에 그리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사람인데, 이제는 제가 웃긴 말을 해도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모진 말을 내뱉곤 합니다. "넌 얘가 말귀를 못 알아먹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그새 내가 다른 외국어를 배워서 쓰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나도 모르게 우리말 문법이 전면 개편되기라도 한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보고 싶다." "사랑한다." 그게 그리 어려운 말인가요? 아니면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단어인가요? 사랑이라는 말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볼드모트 같은 단어라도 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