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도 달려가나
어딘가 낯선 곳에 정착한다는 건 매우 도전적인 과제로 여겨집니다. 보통은 말이죠.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도 아니고, 살콤한 연이 닿아 사뿐히 내려앉고 싶은 도시가 아니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보통은 그러합니다.
제 인생에 역마살이 낀 것도 아닐터인데, 평생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게 역마살인가.) 운이 좋아서 한 곳에 꽤 오랜 기간을 머무르게 되어도 6년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이지요. 그런 영향인지 낯선 곳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덜한 편입니다. 오히려 반기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게 새로운 도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마치 약한 흥분제 역할을 하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놈 약하나?'라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제가 언급한 음료를 먼저 소개해야 하겠군요. 스스로 제조해야 하는 귀찮음을 제외하면 매우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편의점에 들어가 얼음컵을 사고, 그 안에 박카스 한 병, 에너지 드링크, 이온음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넣습니다. 근처 약국에서 미리 사둔 포도당 분말(상표를 언급하는 것이 이상해 이렇게 표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을 넣어주고 빨대로 충분히 저어 줍니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켜고 난 다음의 느낌이 딱 제가 이야기하는 그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마시고 난 다음에 몸에서 느낄 수 있는 반응입니다. 다른 신체적인 변화는 없는데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옵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더 늦게, 더 많이 그리고 더 신나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됩니다. 다음날은 더 이상합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침 일찍 눈이 떠지고, 그렇게 하기 싫던 아침 운동도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여기까지 듣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럼 그거 진짜 좋은 거 아니야? 다른 부작용만 없다면 말이야. 그래그래 커피가 그렇지.' 하지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중독은 바로 그런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효과와 부작용을 모두 알고, 적절하게 조절할 자신이 없다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만일 체험하고 싶다면 숙련된 조교........ 아니 전문가와 함께 하실 것을 권장드립니다.
다시 낯선 삶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새로운 환경, 처음 만나는 사람들, 이전에 해 본 적 없는 일. 이런 것들을 접할 때 제 몸에서 느끼는 반응이 딱 그러합니다. 누군가는 제게 묻습니다. 두렵지 않냐고, 긴장되지 않냐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냐고 말이지요. 전혀 그렇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모두 이겨낼 자신감만 곁에 있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나서기 전에 호주머니 두둑이 챙겨나가면 됩니다.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아, 이 외국인 우리말 잘 못 알아듣네'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나도 '그런 너는 내가 제일 잘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잖아'라는 표정을 지어주면 됩니다. 나만 알게 말이지요.
실패가 두렵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 물론 두렵죠.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인생 초보들입니다. (혹시라도 인생 2회 차인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제게 알려주세요. 같이 손잡고 가서 만나보고 싶어요.) 잘 안되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요. 다음에도 잘 안되면 어떻습니까? 다른 거 잘하면 되지요. 다른 것들도 전부 잘 안된다고요? 뭐 어때요? 꼭 잘해야만 되나요? 노래 가사처럼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보통은 자신이 정주하고 있는 삶을 지루하게 여기고, 꾸역꾸역 그걸 참아내다가 여행이라는 해방구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세요. 일상 자체를 살뜰한 여행으로 바꾸는 겁니다. 하루하루 삶이 여행이라면 굳이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시차를 이기려 커피를 몸에 들이붓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그러려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야겠죠. 엄청난 이삿짐을 가지고 여행을 다닐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한꺼번에 정리하려고 하지는 마셔요. 조금씩 덜어내고,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됩니다. 어차피 삶 끝자락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니까 그때까지 조금씩 비워나가면 됩니다. 무無로 돌아가는 겁니다.
죽음을 코앞에 마주한 순간까지 가져가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돈도 보석도 가방도 시계도 아이폰도 아닙니다. 당신과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기나긴 여정을 하나 끝내고 새로운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친구들이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짐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래도 느긋하게 걸어갈 생각입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여유라는 것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아서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 조금씩 동네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흔적도 남기고 냄새도 맡고 그러겠습니다. (개 아님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