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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Jun 26. 2024

프롤로그

끊임없이 방황하는 영혼, 길을 찾다

회사가 싫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늘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직장 생활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나에게 회사는 유달리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업무가 과중하다거나 사내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거나, 근무 여건이 딱히 나쁘지 않을 때에도 그렇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여의도 IFC에 위치해 있다. IFC(International Finance Center)의 세 동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이다. 금융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한때는 IFC로 출퇴근하면 얼마나 폼이 날까 싶어 이 건물에서 일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도 있었지만 막상 바람이 이루어지니 그 행복은 채 두 달도 가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을지로에서 임대료 높기로 유명한 건물에 회사가 있었는데 사무실 전망으로 청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지인들을 회사 건물에서 만날 때만 잠시 뿌듯할 뿐, 일하는 건물이 아무리 좋아봤자 1인분의 책상에서 종일 노트북만 보다 하루가 끝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하루 쉬는 것조차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을지로 센터원, 그리고 여의도 IFC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죽기 전에 내 삶을 돌아봤을 때, 회사 책상에서 보낸 시간 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고. 이렇게 넓은 세상을 놔두고 코딱지만 한 책상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젊은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은 내 영혼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이 서른둘에 퇴사를 했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만들어 보려고. 그렇게 음반기획사를 창업한 후 10년 가까이 돈을 까먹으며 연명했으나, 유명하지 않은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에 투자해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건 거의 달에서 소금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웠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덮쳤고, 근근이 버티던 문화예술계 회사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장인 시절에는 비록 물질적인 안정을 누렸지만, 내 영혼이 가난하다고 느껴 퇴사했는데 사업을 하는 동안에는 물질적인 안정도, 영혼의 풍요도 모두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스트레스로 인해 몸까지 망가지기 시작하자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증상이 점점 심해져 길거리에서 실신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식 같던 사업을 접고,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회복기를 가졌다.


한참을 쉬다 보니 당연하게도 먹고사는 문제가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그토록 싫어했던 회사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욱 성실한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싸웠다. 


이미 오랜 시간의 방황을 겪은 터라 별생각 없이 회사에 충성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천성을 어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내 인내심이 형편없는 건지. 가족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의 미덕 같은 건 애초부터 내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자, 이 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나는 회사가 싫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늘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직장 생활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나에게 회사는 유달리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업무가 과중하다거나 사내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거나, 근무 여건이 딱히 나쁘지 않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매일 생각한다. 투자회사에서 하루에도 수십 장씩 배출하는 서류더미와 의미 없는 숫자놀음이 대체 누구의 영혼을 더 낫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나의 시간과 주의력을 판 대가로 가족들이 한 달간 먹고살 만큼의 돈이 생기긴 하지만, 그 대신 내 영혼은 다시금 새장에 갇혔다. 나와 결혼한 아내와, 나를 고용한 고용주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다. 이토록 건강하지 못한 불량 남편과 불량 일꾼을 만나게 한 점에 대해.


언젠가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해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온 아내의 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자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람인 것 같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내의 다정하고도 세심한 반응에 탄복하면서도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애초에 내 마음속 심연에서 늘 갈망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무언가 정신적인 것, 그리고 좀 더 영적인 것. 다른 직장인들이 워크-라이프-밸런스를 꿈꿀 때, 나는 늘 나의 정신이 소외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The One, 네오가 되지 못한 Mr. Anderson이자, 껍질을 깨고도 다시 알 속으로 들어가 버린 싱클레어와도 같았다.


플라톤은 말했다. '영혼은 육체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여러 감각을 끊고, 잊어버린 이데아의 세계를 다시 떠올려야 하며, 만약 영혼이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육체를 통해 계속 윤회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내 영혼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건 마치 연가시에 감염된 곤충이 물을 찾아가는 것처럼 치명적인 여정이다. 앞으로 쓰여질 글들은 그 여정의 기록이 될 것이다. 지독하게 물질적인 이 매트릭스 속 현실 자아를 끊어내고, 내 영혼의 이끌림을 통해 걸어보기로 한다. 결국 이 길의 끝에는 넓게 펼쳐진 물이 있을 것이다. 연가시의 숙주가 된 곤충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듯, 이 지독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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