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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Jul 01. 2024

데미안 #1

나와 데미안

때론 책 한 권이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내겐 '데미안'이 그랬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하도 청소년기 필독서니 뭐니 하길래 호기심에 집어 들었던 것 같다. 마침 나도 모태신앙 기독교인으로 태어나 미션스쿨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터라 주인공 싱클레어의 학창 시절 이야기에 매우 공감하며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째 좀 이상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면충돌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아브락삭스라는 이상한 신에 경도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친구 데미안의 엄마를 사랑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은 극에 달했다. 그 무렵 친구들이 처음 보여준 포르노처럼, 기독교인이 읽어서는 안 될 불온서적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짓눌렀다.


헤세가 심어놓은 장치들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나의 영적 첫 경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담배를 처음 피웠던 날이나 처음으로 성경험을 했던 날처럼, 딱히 좋은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겪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견고했던 내 세계에 조용한 균열이 시작됐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나의 감수성은 극에 달했다. 1학년 때 문예부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방황하는 영혼에 대해 사흘 밤낮을 고심하며 쓴 내 처녀작이 담당 선생님과 선배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 낭만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 심취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파란색 꽃'이라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이데아였기 때문에, 신비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작품 '푸른 꽃'은 당시 내 감수성을 대변하는 아이콘과도 같았다. (나는 그 무렵 노발리스의 '푸른 꽃'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bluerose라는 아이디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 역시 노발리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일찍이 삶의 신비를 깨닫고 스물아홉에 요절한 독일의 천재 작가 Novalis (1772-1801)


아무튼 낭만주의 자체가 현실보다는 이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나는 점점 더 불건전한 문학소년이 되어 갔다. 그러다가 알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서른한 살에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이었다. 한창 전혜린의 문장들에 홀려 허우적 대던 사춘기 시절, 나는 그녀의 첫 번역작이 '데미안'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그녀가 문학춘추에 기고했던 '데미안'의 작품해설을 보게 되면서 다시 한번 '데미안'을 읽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두 번째로 접한 '데미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강도로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다니던 고등학교 역시 미션스쿨이었던 터라 나는 여전히 기독교적 세계가 강요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통제와 억압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사춘기의 반항심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내 속에 더 큰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을 사랑하고 보호하셨다는 것, 예수 옆에서 처형당할 때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당당한 인물이었다는 관점 등은 기독교인이었던 내게 여전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속에 겹겹이 쌓여있던 도그마를 해체하고 있었다. 구원의 여인상을 찾아 방황하던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가르침, 에바부인을 사랑했던 싱클레어의 마음까지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로도 20대, 30대를 거치며 이 책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내가 헤세의 '데미안'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건 내 나이가 4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흔히 이 책을 단순한 성장소설이나 혼란과 고통의 시대를 극복한 자아실현에 대한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데미안'은 어디까지나 에소테릭(esoteric) 신비주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동양철학, 신지학회를 연구하고, 한 사람의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던 헤세가 평생에 걸쳐 천착했던 신비주의에 입각해 해석하지 않으면, '데미안'의 에센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

예전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데미안'에 대한 독서평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강사나 패널들 모두 '데미안'을 한 인간의 보편적인 성장 스토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데미안'이 청소년기에 추천도서로 읽히는 것도 좋지만, 다 큰 어른들의 영적 개안을 위한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글부터는 한동안 에소테릭(esoteric) 신비주의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 해석한 ‘데미안’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동안 이 책을 한 편의 청소년 성장 소설로 읽었을 수많은 어른 싱클레어들의 영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임종까지 가지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 '데미안'의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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