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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Jul 08. 2024

데미안 #2

두 개의 세계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 발견하게 되는 두 개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는 아버지의 세계인데 그곳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보호와 사랑, 의무와 죄, 엄격함과 온화함, 명료함과 깨끗함, 참회와 용서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또 다른 세계는 하녀와 견습공들의 세계다. 그곳은 추잡하고 폭력적이며, 사납고 잔인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도살장과 강도, 가정폭력을 일삼는 부랑자나 마녀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그곳은 싱클레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을 벗어날 때마다 늘 격한 냄새를 풍긴다.


여기서 싱클레어가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가 나란히 아버지의 집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눈과 귀가 향하는 곳마다 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부모님과 누이들처럼 모범적이고 경건한 삶을 목표로 하던 싱클레어는 문득, 아버지의 세계야말로 덜 아름답고, 더 지루하며 황량한 곳이라고 느낀다. 평소'돌아온 탕자'에 관한 이야기를 탐독하던 그는 참회한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말에 실망하며, 방황하는 탕자의 모습에 더욱 이끌린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깡패를 만나게 되고, 이때부터 크로머가 명령하면 싱클레어는 복종하는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이웃의 사과를 도둑질한 이야기를 꾸며내게 되는데 이것이 역으로 크로머에게 협박의 빌미를 주게 되어 곤경에 처하고 만다.


싱클레어는 난생처음 적으로부터의 위험과 두려움, 그리고 수치를 맞닥뜨린다. 평소 집안에서 느끼던 안락함은 사라지고, 가족들의 선함이 오히려 그를 향한 비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참회할 수 없는 죄의 비밀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죄성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아버지의 무지에 경멸을 느낀다.


아버지 보다 우월해지는 느낌은 강렬하면서도 매력적이었으며, 갈고리들이 살점을 뜯어내는 것처럼 사악하고도 날카롭게 베어 내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거룩함에는 최초의 균열이 생기고, 싱클레어는 자신의 새로운 자아가 낯선 곳에 뿌리 내림을 직감하게 된다. 선량하고 행복했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자 그는 처음으로 죽음의 본질을 느끼게 되지만 죽음이란 결국 또 다른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마지막 천국과도 같았던 저녁예배에서 더 이상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날 밤 침대에 눕자 묘한 기쁨이 그의 온몸을 휘감는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 마법과 동화처럼 느껴지고, 싱클레어는 본인의 저금통을 깨뜨리며 생애 첫 도둑질을 실행에 옮긴다. 이후 아버지에게 차갑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뒤로하며 '데미안'의 첫 장이 끝난다.


오페라로 치면 '서곡(overture)'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첫 장은 성경 속 창세기의 '실낙원(失樂園)' 즉, 'Paradise Lost'를 상징한다. '아버지의 세계'와 '하녀의 세계'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란, 결국 성경 속 '신성의 세계'와 '뱀의 세계'이며, 첫 장에서 싱클레어는 신성을 잃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멀어짐을 경험한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 '아버지의 세계'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 개념, 관계성 등은 늘 '빛과 어둠', '선과 악', '음과 양'처럼 '양극'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극성의 원칙'이라 부른다. 동전을 아무리 얇게 썰어도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듯, 앞면 없는 뒷면은 존재할 수 없고, 어느 한쪽 없이는 다른 한쪽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양극'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는 완전해진다. 이 '극성의 원칙'은 우리 영혼이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눈'을 갖게 해 준다.


일반적으로 프리메이슨들의 회합 장소인 Lodge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체크무늬의 바닥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교차로 이루어진 이 바닥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의 '양극성'과 그 양극성의 '전체성'을 상징한다. 우리의 영혼은 이 '양극의 전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의미다. 일견 전혀 다른 성질로 보이는 것들은 사실 대립물이 아니라 같은 전체의 부분이며, 늘 동등한 에너지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Freemason Lodge의 모습

  

극 중 크로머는 마치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싱클레어를 타락시킨다. 이때 싱클레어가 훔쳤다고 자랑하는 '사과'란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금단의 열매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사과를 훔쳤다'라고 하는 사건으로 인해 싱클레어는 난생처음 두려움과 수치를 느끼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먹은 직후 하나님을 처음으로 두려워하고, 본인이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게 느껴져 나무 뒤로 숨은 아담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에서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달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옷을 벗고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 유아기'를 상징하는데, 대부분의 비교(秘敎)에서 입문자는 자신이 캄캄한 무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갓 깨달은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 그렇게 싱클레어가 아버지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는 첫 경험은 영적 성장의 출발선 상에 놓이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태고적부터 우리 영혼의 DNA에는 신 또는 우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사랑받을 행동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받아왔기 때문인데 그런 부모의 엄격함을 신과 우주에 그대로 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신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착각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신의 계획 아래 있었다. 본인이 신과 우주, 즉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대립물이 아닌, 전체의 일부분이며, 늘 동등한 에너지를 갖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우리 영혼에 각인된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은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싱클레어는 타락한 본인을 은연중에 자랑스러워하는 경지에 이른다. 아버지 보다 우월해졌다는 기쁨에 취해 그는 더 이상 찬송가를 부르지 않게 되지만, 어쩌면 싱클레어의 아버지는 이미 여러 차례 싱클레어와 같은 경험을 겪으며 성장해 왔을는지 모른다.


대개의 경우 에소테릭(esoteric), 즉 비전(秘傳)이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하강으로부터의 상승'이며, 결국 이에 대한 방법론이다. 세상 대부분의 비밀단체들의 경우 이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상징적 장치로 상징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소설 '데미안'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내용이다.


이제 뒤집어 생각해 보자. 창세기 속 아담의 타락은 사실 아담의 상승이었다. '극성의 원칙'에서 보면 이 세상에 타락 없는 상승은 없다. 상승만이 존재하는 곳에 더 이상의 상승이 있을 수 있을까. '아버지의 세계'를 전체로 관장하는 신은, 이미 본인이 만든 피조물들의 선택을 알고 있었으며, 모든 것은 그의 통제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아담의 행동은 원죄가 아니라 사실상 최초의 축복에 가깝다. 인간은 '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비로소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더 이상 올라갈 곳 없고, 모든 것이 완전하기만 한 채로 수만 년이 지속되는 에덴동산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싱클레어가 느낀 '아버지의 세계'처럼 덜 아름답고, 더 지루하며, 그저 황량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오페라의 서곡과도 같은 첫 장이 지나면 싱클레어의 타락은 결국 싱클레어의 상승으로 이어지며 드라마틱한 서사를 이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데미안'은 단순히 청소년기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상징적 장치들의 의미이다. '데미안'이 많은 영혼들을 '입문자'로 이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오늘날 많은 어른들이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동수


(다음 주에는 '카인' 편으로 돌아옵니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 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또 다른 모든 것들,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며 그래도 그런 것들로부터 한 걸음이면 어머니한테 피신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 데미안 '두 개의 세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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